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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 - 탁재형 여행 산문집
탁재형 지음 / 김영사 / 2016년 8월
평점 :
생각해보면 비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비를 어딘가에서 오도카니 피할 시간도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신나게 맞고 신발을 철벅이며 깔깔거릴 마음의 여유도 가지기 힘들었던 시간이 싫었던 것이다. 여행 도중에,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비를 맞아도 괜찮은 여행이면 좋겠다.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우연히, 당신과 만나는 여행이었으면 좋겠다. - '프롤로그' 중에서
탁PD의 여행 수다
저자는 자신의 여행 수다를 가감 없이 써내려갔다. 아수라가 벌어진 현장에서 혼자 유유히 들이켠 맥주의 진한 맛, 베네수엘라의 골목골목에서
마주한 이방인을 향한 비웃음과 그로 인한 설움, 앞을 향해 집중해서 달리기만 하면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 오토바이의 진정한 자유
등 그의 기억에, 가슴에 차곡차곡 들어찬 그 수많은 성분들은 분명, 아프지만 빛나는
순간들이었다.
우리들의 여행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지난
여행의 감회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면서 만들어내는 그리움과 설렘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길 위에 오른다. 그리고 또 다시 가슴 한켠에 쌓이는
성분들을 지지대 삼아 우리는 또 일상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든
것처럼 살아간다.
저자 탁재형 PD는 2002년 <KBS
월드넷>을 시작으로 <도전! 지구탐험대>, <세계테마기행>, <EBS 다큐프라임 - 안데스> 등 해외 관련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했던 여행 저널리스트이다. 2013년 팟캐스트의 백가쟁명기에 <딴지일보 - 나는 딴따라다>의 게스트로 참여해
호응을 얻은 이후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를 진행해오고
있다.
그는
일상 밖으로 탈출할 것을 권유하는 일상을 살았지만, 정작 자신은 어디에 있든 일상의 무게를 모두 짊어진 채였다. 떠나보아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아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짜릿함과 두려움과 궁금함을 모두 지닌 채. 어느
순간 중력을 거슬러 튀어 오를지 혹은 그대로 흐르는 강물에 추락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일상이 없는 세계로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기록되지 않은 여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
같은 나이의 두
사람 중 더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은 누구일까.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닐까.
기억이 사라진 사람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억에 없는 여행이, 거기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타인의
여행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것은 분명 흥미롭다. 그런데, 만약에 그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탁재형이라면
어떨까? 그는 꽤 오랜 기간 여러 방법을 통해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해왔음에도, 정작 풀어내지 못한 마음 속 울림 깊은 이야기들을 이 책 한
권에 담았다.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
보자.
수첩을 덮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가봤지만 기억나지 않는 장소들을 떠올린다.
만났지만 희미해져버린 사람들을 생각한다.
기록되지 않아 존재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p.40)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말라위의 수도 릴롱궤에 위치한 한 여행자 숙소에서 랄프를 만났다. 그는 멋대로 자란
금발머리와 짧은 수염, 목이 약간 늘어난 티셔츠와 자동차 기름이 묻어 있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말라위는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를
품고 있는 나라임에도 <론리 플래닛>영문판에서조차 이 나라에 대한 여행 정보를 찾아보기 힘들다. 1965년, 우리나라와 국교를 체결한
나라라는 사실을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다만 분명했던 것은,
아직 만나지 못한 아프리카를 좀 더 돌아다녀보고 싶다는 사실이었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탁PD는 묘한 부조화를 깨달았다. 그의 말투에만 귀를 기울이면, 안에 담겨 있는 좌절과 오기와 결단과 고난이 절대로 그에
합당한 무게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맥주가 떨어져서 근처 마트로 차를 몰고 갔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의 말투는 시종 차분하고 담담했다.
이야기가 불러오는 기억과,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에 대해 나라면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을까. 자랑하고 싶은 부분과 강조하고 싶은 부분, 감추고 싶은 부분이 분명 있을
텐데, 그런 기복 없이 지난 일을 그렇게 툭툭 던져놓는 것이 가능했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랄프를 이해할 수 있다. 본디 그런 것이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어떤 것을 한다는 것은.
그 길을 지나온 사람들의 말투는
대체로 나직하고, 담담하다. 자신이 이룬 말도 안 되는 성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시종일관 무덤덤하다.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겐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고 필연적인 귀결이었기
때문에.
크레타 사람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곳 크레타 출신이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그리스인'은
바로 크레타 사람이다. 이들은 그리스 본토인과 달리 곱슬머리와 수염, 풍성한 눈썹과 진한 눈매를 가진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가 그들의
핏속에 함께 교차하고 있다. 삶에 풍파가 많은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크레타 사람들은 이중적이다.
우리는 조르바를 희대의 한량,
무대책의 낭만주의자로 기억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그는 소설 속의 조건을 제공하는 사람일 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목재를 하산하는 장치를
개발하고 마는 강력한 추진력의 소유자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만큼이나,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실현함에 있어서 조르바는
열정적이다.
이곳에서 만난 어부 니키타스는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에 대해 도통 흥미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삶을 최대한 밀고 나가는 중이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할 집을 가지고
싶다. 돈은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온다. 그래서 집을 천천히 짓는다. 철저하게 자기가 설정한, 자기만의 속도에 맞춰서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
자기의 주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자신을 위해 얼마큼의 시간을 어떤 속도로 쓸 것인지 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집을 짓고 있었던 20년 동안, 그는 미다스 왕이 부럽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새벽 바다에 나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그물을 드리우는 시간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도약을 꿈꾼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더 높은 곳을 향해 뛰어올라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래를 향한 도약이다.
놓을 수 있는가.
아래를 보지 않을 수 있는가.
한 걸음 앞으로, 허공을 향해 내디딜 수 있는가.
(/ p.94)
마추픽추
울루루
세계에서 가장 큰 바위 울루루는 넓은 호주 땅에 위치한다. 높이
348미터, ㄷㄹ레는 9,4킬로미터란다. 마추픽추와 쌍벽을 이루는 불가사의한 곳으로 묘사된다. <소년중앙>과 <어깨동무>에
수차례 등장하여 80년대 소년들의 가슴에 이국적인 풍광에 대한 로망의 불을 댕겨준 바위이다.
"드.디.어.여.기.에.왔.구.나."
해외전문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라는 직업을 가진 유일하게 좋은 점은 잡지나
인터넷에서 본 한 장의 사진, 한 줄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실제로 이곳을 가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점이다. 반면에 나쁜 점은 그 장소가 주는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프로듀서의 존재 이유는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여행하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비는 멈추지 않을 거잖아.
어차피 길은 변하지 않을 거잖아.
오늘 저녁, 온 힘을 다해 한 잔의 무스탕 커피를 마시는 게 왜
간사해.
온 힘을 다해 즐거운 생각을 하는 게
어디야.
온 힘을 다해 지금 이 순간, 내 안의 행복을 끌어
모으는 게 뭐가 어때.
뜨겁고, 진하고,
달콤한,
한 잔의 행복을 마시는
게
뭐가 어디가 어때서
그래.
비 따위, 돌멩이 따위, 엉겅퀴
따위.
거머리 따위.
어차피 없어지지도 않을 거면서
(p.129)
소금사막
불량 탈것 예찬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바퀴 두 개 달린 탈것은 저자에게 지혜를
가르쳐준 동시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들을 선사해주었다. 강화도의 굽이치는 산길은 사랑하는 사람과 한 몸이 되어 달린 장소였고, 지리산
오도재의 가파른 코너 길은 겸손과 용기를 배우는 도량이었다. 제주 중산간의 1100도로에서 그는, 바람에도 맛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해남
우수영으로 향하는 새벽의 18번 국도 위에서, 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그는 혼자 소리를 질렀다. 모든 세포는 깨어나 바람을 맞고 있었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이렇게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하면,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멋졌다. 바로 다음 코너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가 코앞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 기쁨을 알게 된 이후로는, 삶의 복잡도가 증가할 때마다 안장 위에 오르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기 점점 더 어려워졌다. 아니, 올라야
했다.
그저 풍경 속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딛기만 하면 돼.
여행이란 그물을 드리우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결국, 그물을 드리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거기엔
반드시, 무엇이든 걸려 있기 마련이다. 그물을 쳐놓은 걸 잊어버려도 상관없다. 그러나 한 번씩 그 그물 친 곳으로 가서 뭐가 걸렸는지 보는 일은
필요하다. 그래야 다음엔 어디에 그물을 쳐야 하는지 알 수 있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