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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평점 :
집 안이 절간처럼 조용했다. 방방마다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바깥마당에 나가봤다. 차가 없었다.
한 대도 없었다. 눈 앞이 핑 돌았다. 어지럼증이 나서 방으로 들어오는데 눈앞에 까만 별이 날아다녔다. 갑자기 햇빛을 봐서가 아니었다. 맹세코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전화기 옆에 메모지 한 장, 그것도 달력을 찢어 만든 성의 없는 메모지가 있었다. '무순아, 잠시만 할머니 잘
부탁한다' - '여름, 슬프거나 말거나 턱이 빠지도록 호박쌈 한입' 중에서
보물지도에 담긴 비밀은?
첩첩산중 두왕리, 일명 아홉모랑이 마을에 사는 여든세 살의 강두용 옹은 막장 드라마를
보던 중 뒷목을 잡고 쓰러져 죽고 만다. 구급차가 아무리 총알처럼 출발해도 산사람의 숨이 넘어갈 때쯤 돼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첩첩산중의
마을이다. 이곳은 충청남도 운산군 산내면 두왕리, 88올림픽 때도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던 한반도의
오지다.
강씨네는 장례를 치르게 되고, 효심 가득한 아들딸들은 시골집에 홀로 남을 팔십 노모가
걱정이다. 남편을 산에 묻고 돌아온 날 호박쌈을 한입 가득 욱여넣는 씩씩한 홍간난 여사지만 말이다. 아들딸들이 고민한 끝에 결정된
사항은, 손녀이자 대입 삼수생으로 최강 백수 강무순을 시골집에 낙오시키는 것이다. 말이 낙오이지 유배인 셈이다. 다음 날 날이 밝고 스무 명
넘게 북적대던 시골집의 아침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고, 그 고요함에 화들짝 놀란 강무순이 마당으로 뛰쳐나오지만 그녀를 반기는 건 마당 앞
부추밭에서 일하는 할머니 홍간난 여사의 등짝이었다.
"이제
일어났구먼"
이 소설의 작가 박연선은 2003년,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데뷔. 드라마 <연애시대>로 시청자들의 가슴에 수많은 명대사를 새겼으며, <얼렁뚱땅
흥신소>로 수많은 '폐인'을 만들었다. 이후 <화이트 크리스마스>, <난폭한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진정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과시하던 어느 날 스토커 같은 편집자에게 잘못 걸려 소설 작가의 삶도 살게 되었다. 그녀는 이 장편소설로 마침내
소설가로 데뷔했다.
"해가 똥꾸녕을
쳐들겄다"
이렇게 억지로 시작된 유배 생활 하루 만에 무순은 너무너무
심심해서 마당에 묶여 있는 강아지 '공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저 집에 개 끌고 돌아다니는 미친년이 산다'는 말을 듣는 동네에서 대체
뭘 하며 지낼 수 있을까? 집밖으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하는 수없이 집 안에서 놀거리를 찾다가, 할아버지의 책장에서 15년 전 자신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지도를 발견한다.
경산 유씨 종택은 17세기 말에 지어졌다가 1910년에 재건축되었는데, 대표적인 양반
가옥으로 'ㅁ'자 구조였다. 무순은 지도에 그려진 대로 종택을 찾아가 보물상자를 파내었다. 따각! 호미 끝에 뭔가 걸렸다. 호미를 버리고
손으로 흙을 긁어냈다. 마침내 보물상자와 마주한 순간, 무순을 좀도둑으로 오해한 종갓집 외동아들 '꽃돌이'와 맞닥뜨린다. 보물상자를 본 꽃돌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자신의 누나이자, 15년 전 실종된 경산 유씨 종갓집의 귀한 외동딸 유선희의 물건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개고생을 했으면 보물이 나와야 하는데 그 상자는 다임개술이었다. 글자가 지워진 오각형의
뱃지 하나, 젖니 하나, 목각 인형 하나엿다.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들며 하늘이 우중충하다. 선풍기를 켜놓고 그 앞에 벌렁 누웠다. 낮잠은 안
잔다고 했지만 졸음이 쏟아진다.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내리친다.
"아무리
게을러터졌어도 그렇지, 비가 오는데 그냥 자빠져 있는 년이
어딨다니?"
젖은 마당을 보니 우산 안
가져다 줬다고 화났나? 싶었다. 홍간난 여사가 맨손으로 뭔가를
쓸어 담는다. 빗물에 쓸려 뭔가 떠내려가는데, 깨알만큼 작은 저것은 진짜 깨다. 분부대로 쓰레받기를 대령했다. 홍간난 여사는 쓰레받기에 들깨를 쓸어 담았다. 그냥 서 있기 뭐해서
깨를 한 알 한 알 줍고 있는데, 홍간난 여사가 쓰레받기를
패대기쳤다. 쓰레받기가 깨지면서 플라스틱 조각이 눈앞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식겁했다.
"염장을 질러라, 이년아. 그걸 하나하나 줍고 있게"
"비 쏟아질 땐 처자빠져 있다가 이제 와서 깨를 줍고 자빠졌네. 게을러 터진
년"
"들깨 한 말 하려면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지 네까짓
게 알기나 아냐? 이 썩을 년아"
"저리 비켜,
이년아"
"빌어먹을 것들. 왜 저런 건 떼놓고 가서 내 속을
썩이는지, 원"
"누군 뭐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어?"
"있기 싫으면 가. 누가 말려?"
"알았어. 갈게. 가면 될 거 아냐!"
15년 전, 당시 최장수 노인의 백수 잔치에 온 마을
사람들이 버스까지 대절해 온천으로 관광을 떠난다. 어른들끼리 목욕도 하고 술도 마시는 자리에 어린 것들을 데려가기 '뭐해서' 온 동네 아이들을
마을에 남겨 놓고 떠났다. 흔히 말하는 '옆집 수저가 몇 쌍인지도 아는' 가족 같은 시골 마을이었기에 별 걱정 없었다.
그날 밤 온천욕 관광을
마치고 귀가한 마을 어른들. 마을이 텅 빈 사이, 네 명의 소녀들이 사라진 것을 알고 충격에 휩싸인다. 당시 사라진 사람은 유선희(16),
삼거리 '허리 병신'네 둘째 딸 황부영(16), 발랑 까지긴 했어도 평범한 집안 딸이었던 유미숙(18), 목사님 막내딸 조예은(7) 등 모두 네
명이었다. 나이도, 학교도, 출신 성분도 다른 소녀 넷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할머니 홍간난 여사의 증언으로는 경찰은 물론 무당까지 나서서 찾아봤지만 이렇다할 단서조차 못
잡았단다.
"벌써 15년이나 지났구먼. 세월이
참……. 그것들이 살었을라나? 살었다고는 못헐 겨"
"살어
있으면 걔들이 지금 몇 살이라니……"
경찰, 과학수사대, 심지어 무당도 포기한 전대미문의 '네 소녀 실종 사건!', 이는
경찰의 추측대로 단순 가출일까? 아니면 납치범이 대체 누굴까? 4차원의 최강 백수 강무순, 팔십 노인 홍간난 여사,
'꽃돌이' 유창희, 이 얼렁뚱땅 탐정 트리오가 벌이는 황당무계한 탐정 놀이가 펼쳐진다.
셋이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물음표가 그려지는
조합이지만, 이 탐정 트리오의 활약이 꽤나 그럴싸하다. 강무순의 4차원적인 추리, 꽃돌이의 날카로운 시선, 유일하게 15년 전 사건을 알고 있는
홍간난 여사의 저돌적인 수사까지, 이들의 수사 방향은 우리들의 배꼽을 빠지게 한다. 소설의 결말은 반전과 함께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