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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평점 :
이 책은 18세기를 중심으로 멀게는 14세기부터 가깝게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비롯해 중국, 일본 그리고 서양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장가 혹은 작가들이 선보인 글쓰기의 미학과 방법을 교차 비교해 살펴보면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접근해 본 작업의 결과물이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동서양 글쓰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18세기 조선을 강타한 동심童心의 글쓰기는 무엇이었는가? 신세계를 향해 떠난 미친 선비
서하객의 60만자 일기에는 어떤 욕망과 포부가 담겨 있었는가? 조닌 계급의 애욕과 삶을 대변한 이하라 사이카쿠의 소설은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서
태어났는가? 풍자의 글쓰기가 유행했던 18세기 영국과 19세기 일본의 제국주의 사회는 어떻게 서로 닮아 있었는가? 서양의 마르코폴로에서 중국의
이탁오와 공안파, 그리고 조선 호모 스크립투스 심노숭에 이르기까지 39명의 동서양 글쓰기 천재들로부터 글쓰기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이는 고故 김수영 시인의 문장론이다. 전위 문학을 고전에
적용하면 '기궤첨신奇詭尖新'한 문학이다. 여기서 기궤奇詭란 '기이하고 괴이하다'는 뜻이고, 첨신尖新이란 '날카롭고 새롭다'는 말이다. 조선에서
기궤첨신한 문학의 대표 작가로는 스승 이익을 넘어 문원文苑(재야 문단)의 권력을 지배했던 혜환 이용휴를 꼽을 수
있다.
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고, 물을 뿜어 무지개를 만든다. 재 가루로 달무리를 이지러뜨리고, 끓는 국으로 여름철 얼음을 만든다. 나무로 만든 소를
걸어가게 하고, 구리로 만든 종을 스스로 울게 한다. 소리로는 귀신을 불러오고, 기운으로는 뱀과 호랑이를 막아낸다. 서방 세계의 끝에서부터 동해
바다의 끝까지를 상상 속에서 눈 깜빡할 동안에 한번 둘러보고, 천상 세계에서부터 지하 세계까지를 생각 속에서 순식간에 도달한다. 백세百世 이전의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그 세상을 기록하고, 천 년 이후의 미래를 미루어 헤아려 그 세상을 예측한다. 비록 지나가버린 옛날의 수많은 철인哲人들도
오히려 타고난 재주와 주어진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이렇게 거대한 직관과 지혜 그리고 거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피와 살덩이에 불과한
7척 몸뚱어리에 부림을 당해서 주색과 재물과 혈기에 빠져서 지낸다면 어찌 크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 '이용휴, <혜환잡저>, 조운거 군에게
주다' 중에서
마치 상상 속 동물인 곤어鯤魚와 대붕의 변신과 비상을 담은 우화를 통해 자유정신을 묘사한
<장자> '소요유逍遙遊' 편을 읽는 것 같다. 특히 상상을 통해 서방 세계의 끝에서 동해 바다의 끝까지 그리고 천상 세계에서 지하
세계까지를 경각頃刻의 시간에 일주한다는 발상과, 백세 이전의 과거를 기록하고 천 년 이후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묘사는 이용휴가 문장 속에 담은
기상과 기백이 얼마나 거대하고 담대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용휴의 잠언 <환아잠還我箴>은 유학사 최고의 이단자 이탁오의
<동심설>을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환아잠>에서 이용휴는 본래의 나를 순수한 천리로 본 다음, 성장하면서 생겨나는
지각과 견식과 재능이 도리어 순수한 천리를 해쳐 참다운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논리를 구사하는데, 강명관 교수는 이용휴의 <환아잠>이
이탁오의 <동심설>을 18세기 조선 버전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하면서 두 글의 논리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왜 이용휴는 <동심설>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강명관 교수는
그 까닭을 "당시의 조선 지식인이 도저히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이탁오의 이단성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이용휴는 "모든 성인은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언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주자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이탁오의 이단적
사유를 이용휴 자신의 글에 담았던 것이다. 생명체의 진화와 혁신은 '돌연변이의 출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법칙은 문장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당대 사람들에게 낯선, 즉 익숙하지 않은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문장은 대개 기이하고 괴상한 문장으로 취급받아 배척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러한 문장의 출현이 글쓰기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고 일거에 혁신했다.
동심의 글쓰기
소품의 글쓰기
풍자의 글쓰기
기궤첨신의 글쓰기
웅혼의 글쓰기
차이와 다양성의 글쓰기
일상의 글쓰기
자의식의 글쓰기
자득의 글쓰기
풍자의 글쓰기
조너선 스위프트는 여행기의 형식을 빌려 세상과 인간을
통렬하게 비판 풍자한 <걸리버여행기>를 집필했다. 일찌기 그는 "풍자란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자신의
얼굴만 빼놓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거울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따라서 풍자가는 마땅히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고 쾌하고 분하게 만들어 자신과 세상과 인간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소인국은 전통적으로 계란의 큰 쪽 끝부터 먼저 깨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현 황제의
할아버지가 어릴 적 관습대로 계란의 '큰 쪽 끝'을 먼저 깨다 손가락을 다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계란의 '작은 쪽 끝'을 먼저 깨야 한다는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시행한다. 그리고 이 법령을 위반한 사람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했다. 그러자 전통적인 관습에 충실한 사람들이 수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어떤 황제는 목숨을 잃고 어떤 황제는 왕위를 잃었다. 그런데 이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모두 이웃한 제국
블레프스큐의 황제들이다. 그들은 반란을 지휘하다가 진압되거나 실패하면 자기 제국으로 몸을 피했다가 다시 소인국에 나타나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이 때문에 걸리버가 소인국에 갔을 때, 이 나라는 블레프스큐 제국과 36개월 동안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영국의 종교 분쟁, 즉 구교와 신교 간의 논쟁과 다툼을 풍자한
것이다.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계란의 '큰 쪽 끝'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 측은 구교를, 새로운 법령에 따라 계란의 '작은 쪽 끝'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 측은 신교를 비유한 것이다. 스위프트가 계란의 어느 쪽 끝을 깨느냐를 두고 다투는 소인국의 이야기에 빗대 신교와 구교의 종교 분쟁을
풍자한 것은 곧 이 종교 논쟁과 다툼이 별반 중요하지 않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를 두고 싸우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조롱과 비웃음이다.
여기에서 현 황제의 할아버지는 종교개혁을 주도한 헨리 8세를, 반란 도중 목숨을 잃은
황제는 청교도혁명 때 처형당한 찰스 1세를, 왕위를 잃은 황제는 명예혁명 때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를, 그리고 블레프스큐 제국은 영국의
신구교 종교 분쟁과 왕위 계승에 개입한 프랑스를 상징하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소인국의 나라' 속 풍자는 현실 세계에 대한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다.
기궤첨신의
글쓰기
사이카쿠의 소설이 대중적으로 성공한 배경에는 "조닌들의
성격과 당대 도시의 풍경을 사실적이고 생생하며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 데 특출난 문학적 재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두 사이카쿠 자신이 상인
계급, 곧 조닌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호색일대남>에 묘사되고 있는 오사카,
교토, 에도 등 대도시 유곽의 주요 향유자는 조닌들이었기 때문에, 유곽의 풍경과 그곳에서 일어난 온갖 사건들은 곧 상인 계급의 생활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조닌 문화 중 하나였다. 오사카의 유곽 문화와 뒷골목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린 다음과 같은 대목은 일찍이 존재했던 그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다. <호색일대남>이 호색 소설 혹은
풍속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리얼리즘 문학의 원형이라는 찬사를 받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오사카에 도착한 요노스케는 오사카 동남부, 다니마치
거리의 후지노다나에 집을 얻어 귀이개 등을 만들며 덧없는 나날을 보냈다. 여전히 연애질은 계속되었고, 고타니나 후다노쓰지의 사창, 월정 계약의
첩, 남자를 좋아하는 식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찾아다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본디 이 길에 몸 바쳐왔던 터라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기생들의 기둥서방을 하기도 했다. 이런 유의 일에 종사하는 여자들은 호적 조사가 두려워 한 남자를 지아비로 가장하고 자신은
매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이 관례이기도 했다. 나카데라초나 오바시 등 절이 많은 동네의 중을 상대로 하는 사창이 있긴 하나 기둥서방들은
연말에 유곽 부근은 얼씬도 못하는 노인네들 돈을 등쳐먹는 일을 하기도 한다. 오, 파파노인이 되어도 색의 번뇌는 어찌할 수
없나니.
차이와 다양성의
글쓰기
박제가는
<정유각집>에서 정조에게 음식과 맛에 비유해 사물의 천성은 제각각 달라서
어느 한 가지로 귀결시킬 수 없는 것처럼, 문장이란 다양한 것, 곧 시대에 따라 변하고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에 "문장의
도는 한 가지로 일괄해서 말할 수가 없다"라고까지 주장했다.
정조의
문체반정을 반박하는 박제가의 논리는 이렇다.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 단맛 등 음식의 맛이란 차이와 다양성이
본질이며 천성이다. 그런데 짠맛이 나는 소금과 매운맛이 나는 겨자와 쓴맛이 나는 찻잎을 두고 매실과 같은 신맛이 나지 않는다면서 나무라거나
처벌한다면, 그것은 소금과 겨자와 찻잎의 본성을 무시하는 것일뿐더러 사물이 지니는 천성을 폐기하려는 것에 다름없다. 만약 이렇게 세상의 모든
맛을 매실의 신맛에 맞추라고 한다면 온 천하의 맛은 반드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정조의 명령대로 세상의 모든 문장을 순정한
고문에 맞추라고 한다면 이로 인해 온 천하의 문장은 반드시 없어지고 말 것이다.
맛으로 말한다면 소금으로는 짠맛을
내고, 매실로는 신맛을 취하고, 겨자에서는 매운맛을 가져오고, 찻잎으로는 쓴맛을 냅니다. 지금 짜지도 않고 시지도 않고 맵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소금과 매실과 겨자와 찻잎에게 죄를 묻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반드시 소금과 매실과 겨자와 찻잎이 그러한 것을
책망하면서 "너는 어찌하여 서적과 같지 않느냐?"하고 하거나 국과 고기에게 "너는 왜 상의 앞에 자리하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지목을 당한
것들은 실질을 잃어버리고 천하의 맛은 폐해지게 될 것 입니다. - '<정유각집>의 비옥희음송 병인'
중에서
일상의
글쓰기
상추쌈을 예찬하며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듯이 세밀하고
생동감 넘치게 상추쌈을 먹는 방법을 묘사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음식인 용미봉탕龍味鳳湯이나 팔진고량八珍膏粱과 같은 음식보다 더 맛있다고
한 글 역시 일상의 하찮은 일을 소재로 삼아 맛깔나게 지어낸 한 편의 희작이다. 특히 상추쌈을 먹는 중에 우스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번 크게
웃기라도 하면 밥알과 상추 잎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사방에 흩뿌려질 것이니 조심하라는 경고 아닌 경고 앞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식사나 회식 중에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매년 여름 단비가 처음 지나가고 나면 상추 잎이 아주 잘 자라서 마치 푸른 비단 치마처럼
싱싱해 보인다. 커다란 동이의 물에 한참 동안 상추를 담갔다가 깨끗하게 씻어낸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받아 두 손을 정갈하게 씻는다. 왼손을
크게 펼쳐서 하늘에서 내리는 장생불사의 감로수를 받아먹기 위해 만들었다는 승로반承露盤처럼 손 모양을 만든 다음 오른손으로 두텁고 커다란 상추를
골라서 두 장을 뒤집어엎고 손바닥 위에 펼쳐놓는다. 이때 비로소 흰밥을 취해 큰 숟가락으로 두드려서 마치 거위 알처럼 둥글게 모양을 만들고 상추
위에 얹어놓는다. 그리고 흰밥의 가장 윗부분을 약간 평평하게 다져놓고 다시 젓가락을 들고 얇게 회를 뜬 소어蘇魚(송어)를 집은 다음
황개장黃芥醬에 담갔다가 흰밥 위에 올려놓는다. ... 처음 상추쌈을 씹을 때에는 옆 사람과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삼가
그렇게 하지 않고 한 번 깔깔거리며 웃기라도 하면, 입에서 내뿜은 하얀 밥알이 이리저리 튀고 파란 상추 잎이 이곳저곳으로 흩뿌려질 것이다.
반드시 입에 든 모든 것을 다 뱉어내고 난 다음에야 멈추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10여 차례 상추쌈을 목구멍 아래로 삼키고 나면, 나는 진실로
천하의 진기한 맛인 용미봉탕과 천하의 진귀한 맛인 팔진고량과 같은 허다한 음식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만다. - '이옥, <백운필>의 <담채>' 중에서
특히 상추쌈을 즐겨 먹었던 우리의 음식
문화를 호방하고 유쾌한 필치로 묘사한 이 글을 보고 있으면, 이옥이 글감의 선택에서 얼마나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웠는가, 표현의 기법에서 얼마나
개성적이고 자유분방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 세태기 혹은 풍속기를 즐겨 썼던 이옥의 글을 통해, 필자는 다시 한 번
일상생활 속 신변잡기와 잡감을 기꺼이 글로 옮겼던 18세기 특유의 미학 의식, 즉 일상성을 접하게 된다.
자득의
글쓰기
'자득'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첫째 독서, 둘째 사색, 셋째 글쓰기 등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쇼펜하우어의
독서에 관한 자득의 철학부터 알아보자. 독서는 분명 글쓰기에 필수불가결한 주춧돌이다. 그러나 모든 독서가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로운 독서도 있다. 그렇다면 해로운 독서란 어떤 독서인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독서, 생각을 마비시키는 독서가 바로 해로운 독서이다.
쇼펜하우어는 "너무 많이 책을 읽는 사람, 거의 종일토록 독서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마치 "말만 타고 다니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을 점차
잊어버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대개 학자라는 사람들의 독서라는 게 그렇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독서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독서는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일 만큼 그의 견해는
급진적이다.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생각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람 마음속의 과정을 반복하는 데에 그친다. ... 많은 학자의 경우가 이러하다. 그들은 독서를 함으로써 바보가 되었다. 여가가 생기면 곧
책을 손에 쥐는 것처럼 쉬지 않고 독서를 계속하는 것은 쉬지 않고 손을 놀리는 일 이상으로 정신을 불구로 만든다. ... 스프링이 계속 다른
물체의 압력을 받으면 탄력을 잃는 것처럼 정신 또한 다른 사람의 사상을 받으면 탄력을 잃게 된다. 영양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위를 해치고, 그
때문에 몸 전체를 해치는 것처럼 정신의 영양도 너무 많이 섭취하게 되면 정신은 질식해버린다. - '쇼펜하우어, <인생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