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에 대한 반론 - 생명공학 시대, 인간의 욕망과 생명윤리
마이클 샌델 지음, 김선욱.이수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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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문 생명윤리학자는 아니지만, 저명한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 의사, 법학자, 공공정책 전문가들과 함께 줄기세포 연구나 생명체 복제 등의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큰 호기심이 일었다. 실제로 그들과의 토론은 대단히 고무적이어서 내게 강렬한 지적 자극을 주었고, 마침내 그것을 계기로 내 강의와 저술에서도 이 주제를 다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 '서문' 중에서

 

 

'유전적 강화'의 윤리에 관하여

 

유전학의 획기적인 발전은 밝은 전망과 어두운 우려를 동시에 안겨준다. 유전학은 인간을 괴롭히는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밝은 전망을 제공한다. 우려되는 점은 새로운 유전학적 지식으로 인해 자연으로서의 우리 모습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가령 근육의 힘과 기억력과 기분을 향상시키고, 자녀의 성별과 키를 비롯한 유전적 특질을 선택하고, 신체적,인지적 능력을 개선하고, 우리 자신을 "비할 데 없는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유전적 강화의 윤리라는 문제와 씨름하려면, 현대사회에서 거의 간과되고 있는 문제들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바로 자연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문제, 주어진 이 세계에서 인류가 취해야 할 적절한 태도에 관한 문제가 그것이다. 이런 문제는 거의 신학의 영역에 가깝기 때문에 현대의 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생명공학의 새로운 힘을 갖게 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勝者獨食사회, 급기야 인간은 유전공학의 힘을 차용해 완벽한 신이 되려는 위험한 항해를 시작했다. 수많은 과학자, 철학자, 정치가, 지성인들이 지적해온 것처럼 유전공학의 발전은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과 동시에 이를 악용하려는 어두운 우려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껏 인간을 괴롭혔던 다양한 질병의 치료와 예방의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선 우리 모두 유전공학을 반길 형편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발전된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유전자 특성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면 과연 향후에 탄생하는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새로운 인간 종種이 출현하는 셈이다. 문제는 출현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전지전능한 힘을 부여받아 마치 신과 같은 위치를 향유하려한다는 점이다. 이는 우려할만한 수준을 뛰어넘는 그 이상이다.  

 

 

 

"유전공학을 이용해 재능과 능력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옳은가?"

 

인류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본성본성을 재설계하는 것은 올바른가. 어째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렇다면 삶과 생명에 대하여 우리들이 견지해야 할 올바른 가치와 미덕은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 '정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박사가 이번에는 생명윤리를 둘러싼 도덕적 난제들에 관하여 흥미진진한 철학적 논쟁을 벌인다.

 

책은 몇 년 전 한 커플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낳기 위해 청각장애자로부터 정자 기증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출발한다. 레즈비언 커플인 샤론 듀세스노와 캔디 매컬로는 청각장애인으로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듣지 못하는 것을 치료해야 할 장애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5대째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가족 출신으로부터 정자 기증을 받아 자신들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 즉 아들 고뱅이 청각장애아로 태어났던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워싱턴 포스트>에 소개된 후 엄청난 비난의 뭇매를 당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세상인들은 이 커플이 고의로 자식에게 장애를 유발했다는 사실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계획적으로 자녀를 청각장애로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청각장애를 유발해서인가, 계획적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인가? 이 사건이 논란으로 비화하기 전, 하버드 대학 교내신문 <하버드 크림슨>에 광고가 하나 실렸다. 내용인 즉, 불임 부부가 난자 제공자를 찾는데, 특별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 신장이 175cm에 탄탄한 몸매여야 하고, 가족 병력이 전무하고, SAT 점수가 1400점 이상이어야 했다. 이에 대한 사례비는 5만 달러였다. 그런데, 이러한 주문형 아이에 대해선 비난이 없었다.

 

 

스포츠의 이상理想: 노력인가, 재능인가

 

마이킁 샌델 교수는 강화와 유전공학에 따르는 주요한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노력과 주체성을 훼손한다는 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더욱 위험한 것은 그러한 기술이 일종의 과도한 행위 주체성을, 다시 말해 우리의 목적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 본성을 비롯한 자연을 개조하려는 프로메테우스적 열망을 대표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인간의 기계화가 아니라 자연과 본성을 정복하려는 충동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인간의 능력과 성취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관점을 놓치고 있으며 심지어 그런 관점을 파괴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은 미약하지만 피나는 노력과 투지, 의지력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빛나는 성공을 거둔 피트 로즈 같은 야구선수에게 존경을 보낸다. 타고난 천부적 재능으로 수월하게 탁월한 송과를 낸 조 디마지오 같은 선수도 존경한다. 그런데, 이 두 선수가 약물을 복용했다면 어느 선수에게서 더 심한 환멸을 느낄까? 스포츠의 이상에서 노력과 재능 중 어느 쪽이 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여길까?

 

 

맞춤 아기의 설계

 

생명공학과 유전학적 강화가 양육양육의 본질을 퇴색시킬 위험이 존재한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가진 재능과 특성을 조건으로 하는 게 아니다. 부모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지지 않고 자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녀를 설계하려는 부모의 오만함, 그리고 샹명 탄생의 신비를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욕구가 문제다.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의학에도 그 방향을 좌우하고 제약하는 목적이 존재한다. 부모에게 아픈 아이를 치료할 의무가 있다면 건강한 아이를 더 강화할 의무,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 아이의 잠재력을 최대화해야 할 의무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건강을 순전히 도구적 관점으로만 보는 것, 즉 다른 뭔가를 최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반면, 강화 찬성론자들은 아이의 능력을 교육우로 향상시키는 것과 생명공학을 통해 향상시키는 것이 원칙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강화 비판론자들은 이 둘이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유전적 구성을 조작해서 아이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우생학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월스트리트의 주식  애널리스트 잭 그루브먼은 자신의 두 살배기 쌍둥이 딸들을  명망 높은 맨해튼 92번가 Y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AT&T 주식을 거짓으로 높게 평가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쓴 그의 사례는 오늘날의 세태를 잘 보여준다. 부모가 자녀에게 갖는 기대치를 변화시키고 아이가 달성해야 하는 성과에 대한 요구를 증가시키는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생명공학 기술로 아이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과도한 간섭과 관리가 수반된 요즘의 양육 방식과 정신적으로 비슷하다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둘이 유사하다 해도 아이의 유전적 조작을 찬성해야 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부모가 지나치게 관리하는 양육 관행에 물음표를 던져봐야 할 이유가 된다. 오늘날 자주 목격되는 과잉 양육은 삶을 선물로 바라보는 관점을 놓친 채 과도하게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심리를 보여주는 징후다. 이것은 우생학에 가까워지는 불안한 징조이기도 하다.

 

 

 

겸손과 책임

 

유전적 강화가 노력과 분투의 의미를 퇴색시킴으로써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책임성의 약화가 아니라 책임성의 증폭이다. 겸손이 와해되면서 책임성이 엄청난 수준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운보다는 선택에 많은 무게를 두게 된다. 아이를 위한 적절한 유전적 특성을 선택한 것이나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 부모에게 지워지게 된다. 또 팀의 승리에 도움이 되는 재능을 획득한 것이나 획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운동선수 자신에게 지워지게 된다.

요즘도 프로스포츠 분야에서 운동능력 강화 약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선수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기대치가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선발 투수가 속한 팀의 득점이 부진하면 나쁜 운을 탓하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요즘은 암페타민이나 여타 자극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상당히 늘어나서, 그런 약제를 복용하지 않고 경기에 나오는 선수들은 "발가벗고 출전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보험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이런저런 질병에 걸릴지 몰라서 건강보험이나 생명보험에 기입해 리스크를 공동 부담한다. 보험 시장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사고와 관련된 위험 요인을 모르거나 통제할 수 없을 때에만 연대성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유전자 검사 기술이 발전하여 각 개인의 병력과 기대수명을 신뢰할 만한수준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보험에 가입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건강하지 못할 운명을 지닌 사람이 부담하는 보험료는 엄청나게 치솟을 것이다. 좋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나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속한 보험회사에서 탈퇴하기 시작하면서 보험의 연대성 측면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반론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교수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강화를 둘러싼 논란에 내재한 도덕적 의미는 자율성이나 권리 같은 익숙한 개념만으로, 또 비용과 이익의 계산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화에 대한 그의 우려는 그것이 개인적 악덕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습관과 존재 방식에 결부되는 문제라는 데 있다.

 

"인간성이라는 뒤틀린 목재를 가지고 똑바른 일을 성취한 예는 없다"

- 칸트

 

우리의 본성에 맞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신 세상에 맞추기 위해 우리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사실 우리의 힘과 자율권을 잃어버리는 행동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하기 힘들어지며, 정치적·사회적 개선을 향한 충동도 무뎌진다. 우리는 새로운 유전학적 힘을 이용해 "인간성이라는 뒤틀린 목재"를 똑바로 펴려고 하기보다는, 불완전한 인간 존재가 지닌 재능과 한계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정치적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 생명의 신비로움을 지켜야 한다

 

미끄러운 경사길 오류, 배아 공장, 난자와 수정란의 상품화를 경고하는 이들의 우려는 타당하다. 그러나 배아 연구가 필연적으로 그런 위험들을 초래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와 연구용 복제를 무조건 금지할 것이 아니라, 초기 인간 생명의 신비로움을 지키기 위한 적절한 도덕적 규제들을 마련한 가운데 그러한 연구를 허용해야 한다.

 

그런 규제책으로는 인간 개체 복제 금지, 연구실에서의 배아 배양시간에 대한 합당한 제한, 불임클리닉 영업의 의무요건 강화, 난자와 정자의 상품화 제한, 특정 주체들이 줄기세포 라인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줄기세포 은행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을 취할 때에야 비로소 초기 단계의 인간 생명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를 막을 수 있으며, 생의학의 발전이 인간적 감수성을 침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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