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피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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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도라쿠 대학 문학부 교수. 이것이 나의 사회적 지위다. 전공은 범죄심리학. 특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TV나 라디오에 출연해서 사건에 대해 분석하는 경우가 있어 세상 사람들에게 그럭저럭 얼굴이 알려져 있다. 나이는 마흔여섯. 어엿한 중년이다. 니시노에 비하면 다소 젊어 보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의 나이는 짐작이 되지 않는다. 자녀들이 아직 중, 고등학생인 걸 보면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또래의 자녀를 둔 부모들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든 것 같기도 하다. 그때 강한 바이탈리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1970년대에 가장 인기 있었던 헤어크림 냄새다. 세련돼 보이는 사람이 왜 이런 헤어크림을 사용할까? 그것이 가장 명백한 중년의 증거처럼 보였다. - '제1장(이웃)' 중에서

 

 

의문의 실종사건을 파헤치다

 

경찰의 검문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 외진 곳인 아닌 이곳 주택가에서 어젯밤 폭행미수사건이 발생했다고 경찰은 설명한다. 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강의하는 주인공은 마흔여섯 살로 여섯살 아래의 부인과 살고 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다. 늦게 귀가하는 주인공, 이미 자고 있는 아내, 이것이 이들 부부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한편, 체포된 범인은 빌라 2층에 사는 스물여덟 살의 남성으로 밝혀졌다.

 

8년 전 여름, 히노 시 다마가와 주택가에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중견 증권사에 근무하는 혼다 요헤이와 아내 교코는 행방불명되기 한 달 전부터 한 남자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남편은 마흔다섯, 아내는 서른아홉, 슬하에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교 2학년 딸이 있었다. 동아리 합숙에 참가했던 딸 혼다 사키만 납치를 면했다. 현재 이 사건을 수사중인 형사는 경시청 수사1과 소속 노가미였다. 주인공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두 사람은 신주쿠 게이오플라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이 사건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도쿄 도 히노 시 혼마치 4번가 자택에서 일가족 세 명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행방불명된 사람은 혼다 요헤이(당시 45세), 혼다 교코(당시 39세), 혼다 요스케(당시 16세). 사건 발생 일시 19××년 8월 5일. 정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히노 경찰서'

 

주인공은 2층 서재에서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해 이 사건을 세 번째 들여다본다. 몇 번을 보아도 똑같았다. 무기질적인 활자의 나열에서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건이 발생한 현장의 지도도 실려 있었다. 문제는 혼다의 집이 상당히 고립된 환경에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도만 보아서는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다시 주거 환경을 떠올려보았다. 모퉁이였다. 서쪽 옆에는 집이 없다. 정면은 다마가와 강의 제방으로 앞에도 집이 없다. 뒤쪽에 집이 한 채 있었지만 집 주인인 고령의 부부와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유일하게 교류가 있었던 것은 미즈타라는 동쪽 옆집 사람으로, 그마저도 얼굴만 알고 지내는 정도였다.

 

12월 30일, 주인공은 노가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집으로 방문한 그는 마치 주인공의 집 주변을 조사하러 온 것 같은 질문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집에는 누가 살고 있지?" 
"고령의 모녀야. 따님이 어머니를 돌보고 있지. 따님도 이미 칠순쯤 됐을걸"
"역시 그렇군"
"뭐가?"
"비슷하지 않나? 이런 생활환경이 말이야"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됐다. 히노 시에서 행방불명된 가족도 뒤쪽에는 고령자 부부가, 동쪽 옆에는 중년 부부가 살고 있었다. 옆집 남자 니시노의 집을 중심으로 보면 앞쪽과 뒤쪽, 동쪽과 서쪽을 바꾸면 생활환경이 매우 유사하다. 더구나 니시노의 집과 행방불명된 가족의 집은 가족 구성과 남녀비율까지 똑같다. 

 

그로부터 닷새쯤 지났을 무렵, 경시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다카쿠라 교수님입니까?" 경시청의 다니모토 형사가 최근에 노가미를 만난 적이 있는지 문의해왔다. 그는 노가미의 후배다. 집에서 만났다고 말하자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를 물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노가미에게 직접 물어봐도 될 일을 굳이 자신에게 묻는 게 이상했다. 전화 통화를 마치자 주인공은 노가미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소설의 초반은 주인공인 다카쿠라 교수의 일상이 기묘한 일들과 얽히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과정을 그려낸다. 먼저 니시노라는 옆집 남자와 그의 가족들이 베일에 싸인 듯 개운치 않은 느낌을 주는데, 이런 의혹은 몇 가지 사건을 거치면서 더 큰 의문과 불길함으로 증폭된다.

 

한편, 노가미는 8년 전 히노 시에서 행방불명된 가족의 주거 환경이 다카쿠라의 집 주변 환경과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학교에서는 논문을 지도해주고 있는 제자가 남학생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그런 와중에 홀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을 수사하던 노가미는 다카쿠라를 만난 이후 갑작스럽게 실종되고, 고령의 모녀가 사는 앞집은 한밤중에 불길에 휩싸인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모녀의 시신 외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 한 구가 더 발견된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네요. 앞집 어르신들이 걱정입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 정도라면 우리 집까지 불길이 미치진 않을 테니까요"

 

옆집 남자 니시노의 반응에 주인공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무섭도록 냉혹한 말이었다. 다나카 모녀의 안부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엉뚱한 대답을 한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표정이었다. 눈에서 탁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정서결핍, 이는 무섭도록 일그러진 성격을 가리키는 말로, 흉악한 범죄자의 공통적인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도 동정을 느끼지 못하는 성격. 그것이 정서결핍이다. 그런 반응을 보여주는 옆집 남자 니시노는 정서결핍에 딱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야기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여러 갈래의 사건들이 하나의 중심점을 향해 밑바닥에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재 사건 이후, 옆집 남자 니시노의 딸이 다카쿠라의 아내에게 도움을 청하듯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고, 노가미의 후배 형사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준다. 옆집 남자의 민낯이 드러나는 동시에 피비린내 나는 폭주극이 펼쳐지기도 한다. 주인공이 소름 끼치는 선물을 받게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단숨에 사이코적인 양상으로 바뀐다.

 

마침내 교활한 범죄자의 실상이 드러나고 범인과의 전면 대결이 시작된다. 하지만 범인의 신원이 밝혀짐과 동시에 이야기는 혈연관계로 넘어가면서 또다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대목에서 작가의 노련미가 돋보인다. 과연 범인을 체포해 그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사건에 휘말린 범죄심리학 교수에게 탐정의 역할을 부여해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는 윤리관과 인간애는 가슴 뭉클하다.

 

 

우리의 이웃을 의심하라

 

소설은 고립되고 단절된 현대인의 생활환경이 범죄를 야기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린다. 이웃의 존재도 모르고, 이웃과 교류 없이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취약한 인간관계는 범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옆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옆집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도 알아채지 못한다. 평범한 이웃이 괴물로 바뀌는 공포, 소설의 이야기는 언제든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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