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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김수환 추기경 1 - 신을 향하여 ㅣ 아, 김수환 추기경 1
이충렬 지음, 조광 감수 / 김영사 / 2016년 2월
평점 :
격동하는 시대를 살았던
추기경 김수환의 생애는 개인사에 그치지 않고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책은 한 개인의 전기임과 동시에 당대를 살았던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에 관한 집단 전기이기도 하다. - '감수의 글'
중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를 따라
1951년 9월 15일, 한국전쟁을
발발한 북한이 연합군에 밀려 항복 직전까지 이르게 되자 뒤늦게 전쟁에 참여해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중국 인민군은 낙동강을 넘지 못하고 후퇴했다.
당시 대구에선 전투가 없었고 평민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대덕산 자락의 빼곡한 초가집 굴뚝에서는 저녁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직 가을이라기엔 이른 시기였다.
대덕산 골짜기를 따라 내려온 물은 계산동으로 흘러들었다. 개천을 따라 시내로 가는 길목에는 붉은 벽돌의
대구대성당(현, 계산성당)이 있다. 조선시대 끝자락에 대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들이 고딕 양식으로
건축한 성당이다. 두 개의 뾰족한 첨탑, 그 위에 십자가가 있다. 이곳은 대구 천주교의 중심 성당이라 일요일엔 신자들로
붐볐다.
오늘은 토요일임에도 개천을 따라
이곳을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 명의 새로운 신부가 탄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대국가 고향인 김수환 부제副祭와 왜관 출신의 정하권 부제였다.
서울에서 대신학교(사제가 되기 위한 대학교와 대학원 과정)를 다니다 대구에 피난와서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 오늘 사제 서품을 받는
것이다.
당시 신학교의 과정은 길었다.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2년,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중고둥학교) 을조에서
소신학교 과정 5년, 대신학교 6년, 총 13년이었다. 이렇게 긴 과정을 마치고 신부가 되는 사람은 입학 때의 5분의 1 정도였다. 그런데,
김수환 부제는 동창들에 비해 4년이 늦은 17년 만에 신학교 과정을 마쳤다.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강제징집을 당했고, 해방 후엔
일본군 전범재판의 증인으로 괌에 다녀오느라 2년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김수환 부제의 친가와 외가는 조선 말
천주교 박해시대부터 신앙을 지켜온 오래된 교우집안이다. 할아버지는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희생된 순교자이고, 어머니와 두 누나는 대구
성요셉성당(현, 남산성당)의 오랜 신자였다. 셋째형은 사제 서품을 받은 김동한 신부다. 외가도 외할아버지, 큰외삼촌, 이모들 모두 신앙심이
깊다고 소문난 신자들이었다. 이처럼 친가나 외가를 아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 대구대성당으로 김수환의 서품식을
축하하러 왔다.
김수환의 부모는 경상북도
칠곡 장자골 옹기촌에서 결혼했다. 당시 아버지는 서른한 살, 어머니는 열입곱 살이었다. 천주교인끼리의
중매결혼이었다. 결혼 후에도 '옹기장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조선 말 천주교 박해 때 순교자의 자손이나
피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옹기 만드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 천주교에서
'옹기장이'라는 단어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옹기를 구우며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조선시대의 신자와 가난한 옹기촌에
살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은 근대의 신자들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래서 훗날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아호雅號를
'옹기'라고 했다. 서품식이 끝나고 가족사진 촬영 후 두 모자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곧 칠순이 될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이는 천주교 집안의 전통이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이제 신부님은 내 아들이 아니라 천주님의 아들이니, 신자들을 잘 잘 보살피이소"
식민지 소년의
분노
당시 제6대 대구교구장을 역임했던
최덕홍 신부(1902~1954년)가 김수환에게 사제 서품을 수여했다. 두 사람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1939년
6월 25일, 최 신부가 소신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4학년이던 수환의 가슴속에 있던 불덩이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신 과목이 끝나자 장면 교장은 그를 교장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얼마 후 그가 시무룩한 모습으로 교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짝인 김정진이 물었다.
"스테파노, 요왕 선생님(장면의 세례명이 요한이었다)이 왜 부르신 거니?" 수환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대답했다. "며칠 전에 수신시험 답안지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라서 천황의 칙유勅諭(친히 내린 말)에 대해 소감이 없다고 썼다고 따귀를 맞았어. 너는 위험해서 신부가 되면 안 되겠다는
말씀도 하셨고. 아무래도 학교에서 쫓겨날 것 같아"
그때 동성학교 교사들 중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분들이 많았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유홍렬 선생은 역사를 가르쳤는데, 일본 역사를 가르치는 척하면서 한국사를
얘기해주었고 한문강사였던 조윤제 선생은 <적벽부>를 가르치면서 신라의 화랑도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또 장면 선생이 교장 업무 때문에
수업을 많이 못하자 새로 부임한 이훈 영어 교사는 창밖을 힐끗거리면서 상해 임시정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밖에 많은 한국인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 일제의 만행들을 이야기했기에 수환의 마음속엔 분노의 불덩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유학과 박사학위
포기
1962년 10월 11일,
가톨릭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다. 세계 각지에서 참석한 주교만 2,540명이었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준비중이던 수환은 독일인 친구 신부들과 함께 바티칸 방송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놓고 발표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문을 활짝 열어 새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대역사였다. 가톨릭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감지했다"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그 발표를 듣는 순간 김수환
학생신부는 강한 전율을 느끼며 온몸이 굳는 듯했다. 이미 회프너 교수신부와 폴크 교수신부의 강의를 통해 들었던 내용들이라 얼른 이해가 됐다.
바로 이거다! 이제 가톨릭이 세상을 향해 엎드리는구나! 성신(성령)이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하고 계시는구나!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의 문이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도교수는 결국 오지 않았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차 로마에 와 있던 서정길 대주교에게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독일에서 보낸 7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비록 박사학위는 받지 못햇지만, 새로운 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신학적 시야와 사고의
폭이 넓어진 시기였다.
초대 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되다
1966년, 마흔네 살의 중년 사제가
된 김수환은 교황청 서울 공사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로부터 전화를 받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주교의 말씀으로는 부산교구에서 마산
지방을 따로 떼어 새로운 교구를 설립하고 초대교구장 주교로 그를 임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산으로 떠나기 전 그동안
다녔던 교도소와 희망원을 방문, 봉사하는 수녀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주교
서품식 일정을 5월 31일로 정한 그는 주교직 사목 표어를 무엇으로 정할지 많은 생각을 했다. 사목 표어는 주교로서의 사목 방향을 짧은 성경
구절이나 기도문 등에서 찾은 성구聖句로, 일종의 각오 같은 것이다.
그는 사제 서품 당시에는 성경
구절에서 성구를 정했지만 이번에는 제2차 바타칸공의회 실천 정신을 나타낼 수 있는 성구로 하고 싶었다. 그는 진정한 주교의 자세는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아야 한다고,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온갖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에 걸맞은 성구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몸을 나누어주시며 우리들의 '밥'이 되어주셨듯, 자신도 모든 이에게 먹히는 존재, 많은 이의 '밥'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라는 경구를 사목 표어로 정했다. 주교 서품식은 마산 성지여중고 운동장에서
거행됐다.
노동자의 인권보호에
앞장서다
1968년 1월, 김수환 주교는
JOC 총무로부터 '심도직물 JOC 회원 관련 보고서'를 전달받았다. 그는 이 사건의 성격을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탄압이자 명백한 종교 탄압이라고 판단하고,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JOC 전국 회원들이 해고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하루 한 끼
절미節米 운동'도 전개해나갔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노동력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이다. 따라서 주교단은 강화성당 신부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활동을 지지한다" - 가톨릭시보(1968년 2월 15일)
중에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주교단 성명인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성명서'는 곧바로 로마교황청을 통해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교황청으로부터 격려서한을 받았다. 이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세상에
대한 거의 최초의 발언으로, 이후 가톨릭교회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생존권보장 요구에 적극 앞장섰다.
서울대교구장이
되다
1968년 5월 29일, 김수환
대주교의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서울시 인구는 약 430만 명이었고, 대교구 산하에 48곳의 성당과 63곳의 공소가 있었다.
신자 수는 약 14만 명이었다. 임시교구장 체제로 운영되던 지난 1년 동안 극심한 재정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마디로 과도기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천은 한국뿐 아니라 오랫동안 가톨릭이 뿌리를 내려온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모두 겪는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변화와 쇄신은
시대의 흐름이었고, 물러설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이었다.
그는 붉은 벽돌의 명동성당을
바라보앗다. 한국 천주교를 상징하는 건물답게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서울과 비교도 안 되게 작은 마산교구의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 되는
신출내기인 내가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대교구를 변화시키고 쇄신할 능력이 있을까?',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추기경에
임명되다
1969년 3월, 로마 교황청과
미국으로의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한국까지 직행 비행기가 없어 일본에서 하루를 잔 후 다음 날 아침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때 게페르트 신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추기경에 서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토록 무거운 소명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는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비서직을
수행중인 장익 신부에게 말했다. "장 신부, 만약 이 소식이 오보가 아니라면 이건 내가 아니라 한국 교회에게 내린 영예야. 선교사 없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 선열들의 믿음을 세계 교회에서 인정한 거야. 이건 절대로 내 개인의 영예가 아닌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