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은 한국사 - 왜 한국사는 세계사인가?
안형환 지음 / 김영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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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란 무엇인가? 한국이라는 국가의 경계, 다시 말해 한반도와 만주 일대라는 지리적 배경을 가진 역사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삼국통일 후 중국에 남겨진 고구려인의 후예 라후족과 백제 유민들의 고장인 백제향, 파미르 고원을 넘은 고선지와 제제왕국의 강력한 통치자 이정기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 '들어가는 말' 중에서

 

 

이젠 열린 한국사를 바라보자

 

중국 산둥반도에 산재해있던 신라방은 국제적인 디아스포라의 한 형태였으며, 고려의 도시 개성에선 고려 여인들이 아라비아인들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었다. 또 조선시대의 궁중 연회에선 무슬림의 코란을 읊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한국사를 복원하고 한국사 속에 숨쉬는 세계를 되살려냄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우고 싶어서다.

 

저자 안형환서울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을 졸업했다. KBS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이다. 균형감 있는 시선으로 역사와 미래를 분석하고 상식을 뒤엎는 역사적 순간을 발견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한국사는 한반도와 만주 일부를 배경으로 하는 사건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세계사 전반을 들여다보면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서 한국의 존재가 발견된다.

 

이슬람 역사가들은 신라로 이주한 아랍인들을 소개했고 몽골에는 고려양이라는 한류의 원조가 있었다. 이 책에서는 바이칼호수 지역에서 뻗어 나온 고구려 시조 주몽에서 여진족

 

 

     

 

8세기 최고의 문화 선진국 통일신라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신라는 당나라와의 7년 전쟁(670~676년) 끝에 승리함으로써 당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삼한일통을 이룩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외세의 힘을 빌려 동족 국가를 붕괴시키고, 만주 벌판을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 고구려는 신라를 같은 민족으로 보았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서로 그렇게 많은 전투를 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단지 경쟁하는 이웃 국가로 바라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31대 신문왕 시절(재위 681~692년), 당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 무열왕 김춘추의 묘호가 '태종'으로 당 태종과 동일하므로 이를 고치라고 하자, 그는 '삼한일통'의 큰 위업을 거두었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는 문무왕 김법민의 아들로 무열왕 김춘추의 손자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역사를 상대, 중대, 하대로 분류하고 있는데, 중대(29대 태종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년)가 바로 신라의 최전성기였다.

 

35대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가 최고조였다. 당시 경주는 인구가 20만(일설엔 70만이라는 주장도 있음)에 달하는 세계적인 대도시였다. 높이 80미터의 황룡사 9층 목조탑을 중심으로 대로변엔 2층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서역인들이 거리를 활발하게 다시는 그런 국제도시였다.

 

이 무렵 신라인들은 세계로 나가 중국 연안에 신라방을 만들어 동중국해, 황해, 남해의 국제 교역망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 많은 학생들과 승려들이 유학 또는 불법을 얻고자 당나라로 떠났다. 특히, 신라의 승려들은 중국과 인도를 넘나들면서 당나라의 불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불교 철학을 완성했다.

 

 

 

무슬림과 쌍벽을 이룬 디아스포라, 신라방

 

조국을 떠나 사는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말한다. 21세기 한국인들은 약 700만 명 넘게 해외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아시아권으로는 중국, 인도 다음으로 한국이다. 지금의 디아스포라의 원형은 통일신라시대의 신라방에서 찾을 수 있다. 이주의 원인을 떠나 이런 디아스포라의 모습이 바로 개방화의 상징일 듯 싶다.

 

산둥반도를 비롯, 중국의 바닷가에는 신리인들이 사는 신라방, 신라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당시 당나라도 국제화되고 개방적인 나라였기에 이런 모습이 가능했다. 이 시절 이민족의 집단 거주지로 번방藩方이 있었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무슬림들이 광동, 천주, 양주 등지에 설립햇던 번방이었다. 무슬림은 번방 내에서 고유의 종교를 믿고, 의상을 입고, 음식을 먹는 등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다.

 

이와 쌍벽을 이룬 것이 바로 신라방이었다. 신라방의 중심지는 산둥반도와 강소성 일대였다. 일본 승려 엔닌<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산둥반도 적산촌에 위치한 적산법화원장보고가 세운 것으로 이곳에서 열리는 법화경 강의엔 매일 40여 명이 참석했고 많을 땐 250명일 때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석한 이들은 모두 신라인이었다.

 

2세기경에 쓰인 중국의 지리서 <절강통지>에는 절강성 연안에 신라오산, 신라산, 신라서, 신라부산 등의 지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기림왕 10년(307년)에 처음으로 신라를 국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지증왕 4년(503년)에 정식으로 신라를 국호로 채택했으니 한반도에서 신라라는 이름을 쓰기 전 이미 중국 남부에서 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한민족의 시원始原을 간직한 바이칼 호수

 

시베리아 바이칼호수에 알흔섬이 있다. 이 섬은 코리족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황소가 하늘에서 내려 온 백조를 부인으로 맞아 11형제를 낳았는데 이들로부터 코리족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 코리족의 한 분파가 바이칼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해 코리→고리→고려(고구려를 본래 고려라고 부른다)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나 <양서梁書>에서는 주몽을 "북이北夷(동이東夷가 아님을 주목하자) 고리국槁離國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청淸대 한자 대사전이랄 수 있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고려의 '려麗'를 '리'로 발음한다고 되어 있다. 또 이 지역에서는 명사수를 투멘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주몽(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과 발음이 비슷하다.

 

현재 바이칼호수 동쪽에는 몽골족의 한 분파인 부르야트족이 살고 있다. 혹자는 이 부르야트가 부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부르야트인들은 샤먼을 지칭하는 말로 아르바이Arbai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r 발음이 약화돼 아바이Abai로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코리족이었던 주몽이 지금의 셀렝게강변에 있던 부르야트족의 나라인 북부여에서 탈출해 남쪽으로 내려와 고리국(고려)를 세우지 않았을까?

 

 

 

라후족, 고구려인의 후손으로 추정 

 

 

 

 

 

 

당시 거란과 맞서고 있던 송나라는 공교역에서 고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때문에 송이 고려로 보내는 이른바 사여품賜與品이 고려가 보내는 조공품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무역 역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고려 말의 세계화

 

13~14세기에 몽골제국은 '팍스 몽골리카(몽골 지배하의 세계 평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동유럽에서 고려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인류 역사상 전에 없는 규모의 인적, 물적 교류를 촉진시켰다. 또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종교 등을 강요하지 않는 몽골의 지배방식 덕분에 몽골제국 안에서는 여러 민족이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의 관직과 녹봉을 받는 여진족 추장들


 

명나라의 쇄국정책으로 대외 관계가 막히기 전까지 한반도에는 외국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래서 귀화하는 이들도 많았다. 우리 역사에서 외국인의 귀화는 고려 현종에서 예종 대에 걸쳐 약 100년 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고려가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초기에는 주로 여진족과 왜인들이 귀화했다.

 

태조 이성게는 여진족을 귀화시키고자 만호萬戶와 천호千戶 등의 관직을 주고, 조선인과의 혼인을 허용했으며, 게다가 그들의 풍속을 인정하며 조선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또 위구르인과 왜인들에게도 후한 대접을 했다. 고려 말에 귀화한 위구르인 설장수薛長壽에게 계림(현, 경주)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해주었고, 대마도에서 온 왜인 9명을 주현州縣에 나누어 거처하게 했다.

 

명나라는 조선 초기 여진족 귀화 정책을 불편한 심정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가 요동 정벌에 관심이 많다고 의심하면서 조선과 여진의 교류를 막고 여진족 회유책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여진족 귀화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세종은 이를 그 어느 왕보다 크게 장려하고 지원했다. 세종 15년(1433년) 김종서가 왕명을 받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동북방 방면에 6진을 설치한 직후 귀화인은 급증했다.

 

 

 

 

귀화한 외래 성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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