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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 담아낸 인문학 - 상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맛있는 이야기
남기현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은 식도락의 기원을 가족의 탄생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수렵시절, 가족이 한데 모여 사냥으로 잡은 짐승을 나눠 먹었던
것이 식도락의 시작이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음식이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을 넘어
한 사람, 한 가족의 역사와 문화, 개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 '머리말' 중에서
음식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
책의 저자
남기현은 매일경제신문 기자이다. 그는 삼성 그룹의 사업 구조 개편 등 다수의 특종 기사를 쓰면서 주요 산업 현장을
누볐으며, 증권부 시절엔 일부 대기업의 부당 기업어음의 발행 사실을 특종 보도하기도 했다. 또 그는 유통부에서 1년간 식품팀장을 맡아 관련
산업과 시장, 다양한 음식 문화를 취재했다. 이 책이 당시의 취재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것이다.
청나라의 서태후는 저녁 식탁에 메인
요리가 50개가 넘었고 하루 500근의 고기와 100여 종에 달하는 산해진미가 총동원될 정도로 호사스런 음식을 줄겼다고 한다. 먹는 음식만 봐도
그녀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사치스럽고 과시욕이 강하며, 식탐이 강해서 자기 절제력이 떨어지는 그런 여자였다.
그렇다. 음식을 이해하면 한 개인과
가족은 물론 그들이 속한 사회나 나라를 이해할 수도 있다. 이에 저자는 음식을 인문학적으로 취급해 볼 가치가 충분한 소재라고 판단해 책의 집필에
나섰다. 사실 먹는 음식의 기원이나 그 속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서 먹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햄버거 하나를 먹더라도 그
음식을 알고 먹는다면 훨씬 재미있는 식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치아가 부실해 순두부를 즐겨
먹는 편이다. 단지 식감이 부드러워 잘 씹지 않아도 먹기에 불편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자주 먹는 음식일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강릉 초당순두부가 바닷물을 간수로 이용한다길래 뭔가 친자연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이 식품에
그동안 후한 점수를 주었었는데, 허난설헌과 허균의 부친 허엽 옹이 당시 삼척부사로 재직시 기근에 시달리던 강원도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역사적
기원을 알게 되었기에 앞으론 먹을 때마다 나눔과 베품을 떠올릴 것 같다.
잡 나간 며느리가 다시
찾아온다
가을 한 철은 제철 음식인 전어가
대접을 받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사실 대학 시절 즐겨 찾던 포장마차에선 전어구이를 서비스로 주었던 생선이다. 그 정도로 푸대접받던
생선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놈은 몸에 가시가 많아 먹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던 요즘은 매스컴의 효과로 이 생선이
대접받으면서 지방에선 전어 축제까지 열린다.
그런데, 책에 실린 일본의 옛 일화를
읽노라면 앞으론 먹기에 좀 찝질할 것 같다. 그 연유를 말해 보겠다. 일본의 한 영주영주가 동네의 한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 여자를 취하기로
맘 먹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처자가 딸린 유부남이었다. 하긴 과거엔 가난이 죄라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 첩이 되는 게 가족들에게 약간의
지참금을 베풀 수 있기에 효도의 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이 딸의 아버지는 꽃같은 딸을
첩으로 줄 수 없다고 생각해 잔꾀를 내었다. 관 속에 딸 대신 '고노시로'라는 생선을 잔뜩 집어넣고 화장을 했던
것이다. 비명 횡사해서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거짓 눈물과 곡까지 하면서 영주가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영주와 딸의 혼사 문제는
취소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 때문에 일본인들은
고노시로를 '자식을 대신한다'는 의미로 여겼다. 그래서 여간해선 이를 구워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대신에
이들은 초밥용 생선으로 즐겨 먹는 모양이다. 고노시로는 바로 우리말로 '전어'다. 물론 우리도 초장에 찍어 회로 먹거나 잘게 썰어 회무침으로도
먹는다. 가시가 많긴 하지만 비교적 연하기 때문에 날 것으로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구운 전어의 맛은 고소해서 정말 일품이다. 오죽하면 '집
나간 며느리가 이 냄새를 맡고 돌아온다'는 속담이 생겼을까 말이다.
크루아상, 이슬람에서
싫어하는 빵
아침에 밥 대신 빵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다. 빵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크루아상은 어느 나라 빵일까? 지금껏 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빵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빵의 공향은 오스트리아라는 게 정설이란다. 평범한 듯 보여도 이 빵엔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어
'크루아상croissant'은 '초승달'을 의미한다. 그런데, 초승달은 이슬람
국가의 상징이다. 십자가 문양이 기독교임을 나타내 주는 것처럼 이슬람 국가인 터키, 말레이지아, 알제리, 파키스탄, 튀니지, 싱가폴 등의 국기엔
초승달이 그려져 있다. 그러니 초승달을 씹어 먹을 수 있겠는가?
1636년, 오스만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제빵 기술자였던 페터 벤더가 밀가루를 가지러 창고에
갔다가 오스만튀르크 군인들이 성벽 아래 터널을 뚫고 폭발물을 설치해 성벽을 무너뜨린다는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
오스트리아 사람인
그는 이 사실을 곧바로 오스트리아 군대에 알렸고, 오스트리아는 선수를 쳐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페터 벤더의 공로를
인정해 그가 만드는 빵과 가게에 당시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던 페데스부르크 가문 심벌을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그는 이에 대한 고마움과
군대의 사기를 높일 목적으로 오스만튀르크 국기에 새겨져 있던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나눠 줬는데 이것이 크루아상의 시작이다.
전쟁에서 진 것도 분한 일인데, 초승달 모양의 빵을 신나게 뜯어 먹는 모습에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말이다.
꿩 대신
딹
이 말의 유래는 떡국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 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떡국의 국물은 주로 꿩고기를 우려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생동물인 꿩을 잡기가 힘들므로 꿩 대산 닭으로 국물을 내는 경우도 많다고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꼭 맞는 게 없을 경우 이와
비슷한 것으로 대신할 때 우리는 이를 '꿩 대신 닭'이란 말로 비유한다.
떡국은 가래떡을 썰어서 끓여 만든다.
예로부터 가래떡은 양陽의 기운을 상징했다. 흰쌀로 만든 가래떡은 높은 열량 때문에 양의 음식으로 분류된 것 같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은 새해
첫날 떡국을 먹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세시풍속사전>에 따르면 가늘고 길게 생긴 가래떡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길 기원한다'는 무병장수의 의미가 담겨 있고, 가래떡을 엽전 모양으로 썰었다는 것은 떡국에 재물 복, 즉 풍요를 바라는 마음을 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흰 떡을 조금씩 떼어 손으로 비벼 둥글고 문어발 같이 늘리는데 이를 권모拳模라 한다. 제석除夕에 권모를 엽전 모양으로
잘게 썰어 넣은 뒤 한 그릇씩 먹으니 이것을 떡국이라 한다" - 조선 시대
한양의 풍속을 담은 <열양세시기> 중에서
섣달그믐날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음력설은 양력 기준으로 보통 1월 말 또는 2월 초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음陰의 기운이 가득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양의 기운, 즉 따뜻한 봄을
준비하는 때이다. 그러하니 양을 상징하는 가래떡으로 떡국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자연스레 생긴 듯하다. 이처럼 음식에는 음양의 조화도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광엔 굴비가
없다(?)
명절이나 제사상에 꼭 올리는 음식
중의 하나가 굴비다. 생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건어물이 굴비인데, 조기를 짚으로 엮어 매달면 등이 굽어지는
모양새가 된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등이 굽은 조기라 해서 '구비仇非 조기'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구비란
구부러진 모양을 일컫는 순우리말 '굽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구비가 시간이 흐르면서 굴비로 변했다는 게
정설이다.
호남 향토음식점에 가면 가끔
보리굴비를 만날 수 있다. 이는 굴비를 보리 뒤주나 보릿자루에 보관해서 숙성시킨 것이다. 뒤주 안 온도는 서늘하고
보리의 겉겨가 굴비의 기름기를 흡수함으로써 비린내가 적고 장기간 보관도 용이한 음식으로 재탄생되는 셈이다.
굴비의 본고장은 전남
영광으로 알려져 있다. 나 어릴 적엔 시험 문제로도 출제되곤 했다. 아무튼 영광 앞 바다(칠산 바다)에서 과거부터 조기가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무래도 바닷물의 흐름이 바뀐 것 같다. 지금은 영광 법성포로 몰려 들었던 조기들이 제주도
인근 추자도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잡힌 조기를 법성포로 들여와 작업해서 영광 법성포 굴비로 만든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봄과 여름 사이 어선들이 칠산 바다에 모여 그물을
치고 조기를 잡는다는 기록이 나온다. 얼마나 조기가 많이 잡혓는지 강아지조차 조기를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법성포 굴비만 그렇게
유명할까? 영광 주민들은 "굴비의 맛은 조기가 어디서 잡혔는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조기를 말리는 지역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른 지역의
굴비는 조기를 소금물에 담갔다 말리는데 비래 법성포는 영광에서 나는 천일염으로 일일이 조기를 절이고(크기에 따라 절이는 시간까지 조절한다고
함), 법성포의 습도와 일조량, 바람의 강도로 말려서 맛 좋은 굴비를 만든다는 주장이다. 즉 정성이 맛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음식에는 역사가 숨쉬고
있다
이렇듯 우리가 흔히 먹는 평범한
음식에 담긴 흥미로운 사연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 음식이 달라 보인다. 우리가 먹는 것들 자체가 인류 문명사의 중요한 증거 자료인
셈이다. 음식에 담긴 일화나 사연을 통해 지금의 우리들은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의 우리 모습까지 통찰하게
한다.
지금은 '음식의 시대'라 불릴 만하다.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현대인들에게 음식은 더
이상 허기를 채우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 이젠 음식을 입으로, 눈으로, 냄새로 즐기게 됨으로써 즐거움과 문화를 배운다. 어떻게 초당 순두부가
탄생되었는지, 왜 무슬림은 크루아상 빵을 싫어하는지, 일본인은 왜 전어구이를 잘 먹지 않는지, 영광굴비의 고향이 사실은 영광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음식에 우리의 삶과 문화, 애환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