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라디오
모자 지음, 민효인 그림 / 첫눈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책에는 평범해서 더 특별한 일상의 기억들, 잊고 지낸 추억들, 알다가도 모를 마음의 조각들,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세상을 향한 독특하고도 날카로운 관찰력이 돋보인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평범해서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일상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 그리고 라디오

 

나는 라디오 애청자 세대이다. 공부를 할 때에도 늘 라디오를 켜 놓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혼이 많이 나곤 했다. 아무리 혼이 나도 때를 노렸다가 라디오를 켰다. 낮보다 밤엔 더 심했다. 공부방이 안방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어머니의 감시는 더욱 심했다. 제발 불 좀 끄고 자자고 말이다. 사실 나의 공부방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안방과는 정 반대편에 있었다. 이젠 나이가 들어 왜 어머니의 간섭이 그리도 심했는지 나는 안다. 흥흥흥

 

한 밤중에 듣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나에게 무척이나 영향을 미쳤다. 친구나 부모로부터 미처 듣지 못한 예민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 다방의 DJ처럼 애청자의 신청 사연을 들려주는 그 목소리가 정말 귀에 속속 들어왔다. 아마도 학교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전교 1등은 따논 당상일 것이다. 당연히 그 분위기도 한몫 했다. 신청곡들이 정말 압권이었다. 이런 시간의 연속 속에서 나의 마음은 성장해 갔다. 비록 세월이 제법 흘렀지만 지금 세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지 싶다.    

 

세상을 마음으로 관찰하는 작가. 필명 모자의 의미는 작가의 말로 대신한다. '모자를 좋아합니다. 모자라서 그런 가 봅니다' 조금은 서툴렀던 자신의 지난 과거 속에서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다'고 느낀 것들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점이 매력이다. 꾸밈없이 담백하게 쓴 그의 글이, 진심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추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서
잠에 들 시간을 계산하고
출근을 하자마자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나는
청춘의 하루가
날아가는 것을 아까워하면서도
하루가
빨리 끝나기만을
- '하루' 중에서

 

 

책의 저자는 수십 년 넘게 써온 아버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짜릿한 재미를 즐겼다고 한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날엔 여지없이 아버지의 일기장을 뒤적거렸다고 술회한다. 뭔가 그 속에서 발견하는 보물이 있었나 보다. 한 번은 일기장에 숨겨진 10만 원짜리 수표를 발견해 어머니에게 이를 고자질하는 약간은 모자란 그런 아이였다. 일기장을 훔쳐본다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한 셈이니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방문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 중학생이 되면서부턴 아예 관심을 끊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고등학생 때 방구석에 먼지가 잔뜩 쌓인 이 일기장을 다시 읽고 나서는 더 이상 여기에 손을 댈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철이 들어 아버지의 고민과 슬픔을 알게 되었고, 이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일기장의 주인인 아버지의 고독과 애환을 이해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별이 빛나는 이유를 과학자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수많은 공식과 이론들을 인용하면서 태양이 붐어내는 빛이 반사되어 별이 빛난다는 걸 밝혀낸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런 공식과 이론에 별 관심이 없다. 단지 별이 빛난다는 사실을 알기만 하면 된다. 별을 함께 바라보는 내 옆의 당신이 아름답다. 굳이 아름다운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

 

 


 

 

예쁜 소품들이 아기자기하게 늘어선
카페에 앉아 있을 때면
'나도 이런 커피숍 하나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한때는 이 생각에 빠져서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는 법까지 알아보았다.

커피 용품을 하나 둘 사 모으고
책을 보고 커피 내리는 연습을 하면서
한동안 열정적이었다.

시간이 지나 내 열정은 차츰 시들해졌고,
어느새 내가 모아둔 커피 용품들은
주방 한 구석에서 먼지만 입은 채
매일 나를 기다린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저
남의 성공을 보면서 부러웠던 것 같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은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가 흔히 성공이란 단어와 연관 짓는
'열정, 도전, 노력' 같은 단어들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내가 매일 하고 있는 일들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노력으로 비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보상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엄청난 성취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지금 힘들게 살고 있는 내 인생은,
누군가에겐
엄청난 성공 끝에야 만날 수 있는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때에야 조건을 따지게 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만나야 할 이유가 있어야만 만남이 계속될 테니까.

사랑한다면,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워 시간이 가는 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상황이나 조건에서 찾으려 하지 말자.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샤워를 하고
내일 할 일을 정리하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들기 편한 모양을 잡기 위해 몇 번을 뒤척인다.
편안한 마음으로 잘 준비를 마친 후에
핸드폰을 들어 SNS에 접속한다.

오늘 하루 내 주변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하루를 보냈는지
궁금한 마음이 든다.

남들의 일상을 보면서
오늘 나는 즐거운 하루를 살았는지,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특별해지길 원하면서도
남들의 일상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싶은 걸까.
자랑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던 것이 아니었는데…
- '# Scene 1' 중에서

 

 


 

언제부턴가 여행을 떠나면

사진을 남기는 게 중요한 일이 되었다.

 

기억하고 싶은 장소

추억하고 싶은 사람들

근사한 저녁과 달콤한 군것질

 

잊고 싶지 않아 연신 사진을 남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되는 건

사진에선 볼 수 없는 다른 기억들

 



 

방구석 라디오

 

중학생까지만 하더라도 엄마와 저자는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다. 심심할 때면 종종 안방에 찾아가 TV를 보고 있는 엄마 곁에 누워 말을 걸곤 했다. TV를 보는데 흥미가 떨어지면 우리는 라디오를 틀었다. 수신이 잘 되도록 안테나를 길게 뽑아서 감도가 좋은 방향을 찾아 고정한 다음, 채널을 변경하는 작은 원형의 릴을 돌려 괜찮은 노래가 나오는 곳에서 멈추곤 했다.

 

대낮의 라디오에는 신세대 가수의 노래들이 즐비했지만 저자보다 나이가 많은 노래도 종종 나왔다. 저자의 별들이 부르는 노래와 엄마의 별이었던 이들의 노래가 번갈아 흐르는 신기한 음악상자 덕분에 저자는 자연스레 옛날 노래에 익숙해져갔다. 엄마와 저자가 함께 반복하던 하루는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났다. 고등학교 1학년을 보내는 동안 키 17센티가 훌쩍 자랐다. 키가 크고 학교와 친구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저자는 차츰 바빠지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은 후에도 여전히 라디오를 즐겨 들었지만 라디오의 위치는 어느새 저자의 방 머리맡으로 바뀌었고, 모르는 사이에 엄마와의 대화는 시계 바늘이 돌아가는 딱 그만큼씩 줄어들었다. 대단치 않은 일상의 기억들인 것 같은데, 나이를 먹으면서 저자는 그걸 풍선처럼 마구 부풀려 자신의 중요한 일부인 마냥 소중히 간직하려고 발버둥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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