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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의 그랜드투어 : 지중해 편 - 사람, 역사, 문명을 거닐고 사유하고 통찰하는 세계사 여행 ㅣ 송동훈의 그랜드투어
송동훈 지음 / 김영사 / 2012년 7월
평점 :
문명의 시원을 찾아 그리스 터키 스페인을 가다
쪽빛 바다 지중해는 유럽의 문명과 깊은 연관성을 가졌다. 지중해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리스, 터키, 그리고 스페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매우 의미있다.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발상지다. 터키는 수많은 문명을 잉태하고 길러낸 보고寶庫다. 스페인은 번영과 쇠락이 반복되면서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창조해낸 땅이다.
최근 그리스와 스페인은 TV 미디어의 단골 손님이다. 재정 위기로 유럽발 세계 경제 위기의 주범들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국민들은 게으르고 분수넘는 과소비를 일삼는다고 낙인 찍혔다. 그러나, 바람은 언젠가 지나가기 마련이다. 늘 그래왔다.
이 책의 저자 송동훈은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10년 넘게 기자생활 하다가 문화 콘텐츠 사업체 풍월당風月堂을 창업하여 여행과 역사에 관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5년에 걸쳐 유럽 3부작을 완성했는데, 이 책은 세계사 여행 그랜드 투어 - 서유럽편, 동유럽편에 이어 마지막 3부 지중해편이다.
그리스는 태양의 나라다. 찬란한 빛 때문에 대지는 밝고 활기차다. 특히, 봄은 더욱 그러하다. 어딜 가나 꽃들이 가득하고 향기가 진동한다. 그리스에서의 여행은 눈부시고 취한다. 이중에서도 절정은 아테네다. 이 위대한 도시는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창조한 곳이다.
터키는 풍요로운 땅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평원은 옥토 그 자체다. 이 풍요로움이 문명을 낳았고, 고대의 히타이트 제국과 리디아 왕국이 대표격이다. 이 풍요로움은 이웃 나라들을 자극해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로마 제국이 이 땅을 정복했던 것이다. 터키엔 이스탄불이 있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 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이 도시는 언제나 활력 넘치고 시끌벅적하다. 수백 개의 모스크와 현대적 건물이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펼친다.
스페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투우, 플라멩코, 오렌지와 올리브, 스페인 전통 햄 하몽, 스페인 식 볶음밥 파에야, 그리고 축구 등을 얘기한다. 어떤 이는 예술가의 나라로 기억한다.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 천재 건축가 가우디,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 달리, 미로 등을 떠올릴 것이다. 스페인은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로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나라다. 난공불락의 도시 톨레도, 기독교 왕국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 8백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던 남부지역 안달루시아 등 우리나라보다 다섯 배나 큰 땅이다.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세비야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고 스페인은 제국이 되었다.
아테네에 가면, 먼저 프닉스PNYX를 찾으라
아테네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아크로폴리스다. 관광객은 대개 아클로폴리스만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닉스를 건너뛴 아테네 여행은 의미가 없다. 먼 예옛날 아테네의 시민들은 언제나 프닉스에 모여 민회를 열고, 국가의 대소사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결정했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민주주의의 탄생지다!
2,600년 전 민주주의 방향을 제시한 사람은 현인 솔론(BC 640~560)이다. 그는 아테네 왕족의 후손이다. 고대 아테네는 오래전 왕정이 끝나면서 부와 권력이 귀족들에게 넘어갔기에 대다수의 왕손은 여전히 귀족으로서 떵떵거리며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솔론의 집안은 예외였다. 그의 아버지가 대부분의 재산을 자선사업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를 수치로 여겼기에 젊어서부터 외국과 장사를 했다. 그가 해외무역을 업으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여러 세상의 지식과 경험을 쌓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부와 함께 지혜를 얻었다. 그리스의 현인 7인에 꼽힐 정도였다.
그가 한창 상인으로 활동하던 시대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너무도 지나쳐 공동체의 안정적인 번영을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었다. 기득층의 반대에 부딪혀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만 세력과 체제 유지 세력들 간에 혁명과 반혁명이 되풀이되었다. 이 시절에 질서와 안정을 구실로 뛰어난 독재자가 정권을 장악하는 참주정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생계 유지에 실패한 소농들이 처음엔 부유한 귀족에게 땅을 잡히고 돈을 차용했다. 빚이 쌓이면 땅은 몰수되었다. 그 다음엔 자신의 몸을 저당잡혔다. 끝내 빚을 갚지 못한 농민들은 귀족의 노예가 되거나 해외로 팔려나갔다. 심지어 해외로 도주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는 솔론을 당시 최고 행정직인 '아르콘'에 선출했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개혁을 단행했다. 첫째,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아테네 시민을 모두 해방시켰다. 둘째, 빚을 탕감하고 잃어버린 토지도 회복시켜주었다. 또한, 정치적 혁명도 이끌어냈다. 귀족과 더불어 상인계급에서도 최고 권력자를 배출할 수 있도록 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곡물 재배를 포기하고, 올리브와 포도 등 특화작물의 생산에 주력했다. 그의 농업 정책은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다.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생산하는 제조업, 운반 용기인 도자기를 제조하는 산업, 조선업, 해운업 등이 덩달아 성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아테네를 죽음 직전에서 구원했다. 아울러 이테네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아테네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초석을 깔고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불의와 탐욕을 미워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정의를 굳게 믿었다. 그의 개혁 이후로 민회의 개최를 알리는 연기가 프닉스 언덕에 피어오르면, 아테네 시민들은 이곳으로 모였다. 민주주의 성지, 프닉스를 결코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매듭의 비밀을 풀어라, 폐허에서 만난 진정한 정복자
발굴과 복원 작업이 한창인 '고르디온의 유적'을 찾아간다. 프리지아 왕국의 수도, 전설적인 거부 미다스 왕의 도시 고르디온. 한때 풍요로움과 부유함의 상징이었던 이 도시는 폐허 속에 뒹굴고있다. 이곳으로의 여행 목적은 역사 속의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함이다.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것"
그는 겨울 한 때를 이 도시에서 지냈다. 그 때 그의 머릿속은 온통 동방 정복으로 가득했다. 그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세상 끝까지 가보고자 했다. 그리고 누구도 세우지 못한 거대한 제국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 거대한 매듭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칼을 섬광처럼 내리쳤다. 매듭이 풀렸다. 어느 누구도 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시아의 지배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로스다.
그는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최고의 선생들에 의해 철저하게 왕으로 키워졌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는 가장 훌륭한 교육이야말로 아들에게 물려줄 가장 값진 유산임을 알고 있었다. 대표적인 선생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기원전 336년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그는 스무 살에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보다 더 큰 꿈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꿈은 '페르시아 정복'이었다. 알렉산드로스를 얕보고 테베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반 마케도니아 연합이 결정되자, 그는 신속하게 진격하여 테베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344년 봄, 그리스를 평정한 그는 3만 명의 보병과 5천 명 이상의 기병을 이끌고 동방으로 향했다. 그의 원정대에는 수많은 학자, 연구원, 기술자, 건축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원정은 단순한 군사적 목적을 뛰어넘어 꿈과 희망을 찾는 과업이었던 셈이다.
터키 땅에 들어선 알렉산드로스와 군대는 동쪽으로 향했다. 기원전 334년 초여름, 그라니코스 강변에서 첫 충돌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를 앞세운 마케도니아는 압승하며 아나톨리아를 정복했다. 그해 겨울 그는 아나톨리아의 중앙에 위치한 프리지아 왕국의 수도 고르디온에서 지냈다. 이 때 '고르디온의 매듭'일화가 탄생했던 것이다.
아름다움에 한숨짓고 숨겨진 역사에 탄식하다
일몰 후의 알람브라 궁전이 너무 멋있다는 글귀들을 여러 책에서 읽은 터라 이곳은 꼭 가보기로 작정했다. 워낙 석양을 좋아하는 아내이기에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을 스페인으로 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알람브라 궁전 때문이기도 했다. 이 궁전의 전망에 제일 좋다는 장소가 바로 성 니콜라스 광장이다. 석양에 물든 알람브라는 형형색색이다. 자석처럼 끌리는 입맞춤.
그라나다 왕국은 나시르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시조 무하마드 1세는 작은 도시 아르호나의 토호였다. 1232년 4월, 그는 스스로 술탄이라 칭하고 권력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당시 스페인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달루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던 알모하드 제국이 1212년 기독교 국가 연합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해 붕괴되고 있었다. 안달루시아에 권력 공백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수많은 야심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칼을 뽑았다. 나시르 가문의 무하마드 1세도 그런 사람이었다.
무하마드 1세는 탁월한 정치가였다. 수많은 지방 귀족과 손을 잡아 세력을 확장했고, 안달루시아의 중심 도시인 그라나다를 정복해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안달루시아를 위협하는 카스티야 왕국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왕국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를 그라나다 왕국의 상왕으로 인정하면서 안정을 도모했다. 나아가 1248년 페르난도 3세를 도와 무슬림의 도시인 세비야를 함락시켰다. 그 대가로 그라나다 왕국은 안정과 번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무하마드 2세 치하에서 더욱 발전했으며, 5세 치세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문화, 학문, 예술, 경제가 찬란한 꽃을 피었고, '알람브라'는 바로 그 열매였다.
15세기에 들러 고작 여섯 살인 무하마드 8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당파간 권력다툼이 치열했다. 1419년 삼촌뻘인 무하마드 9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내분의 수준이 피를 동반할 정도였다. 무하마드 9세는 일생 동안 왕위에 오르내리기를 무려 4번이나 반복했다. 이 혼란으로 나라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카스티야에 강력한 군주 이사벨 1세가 출현,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한 후 스페인 남부에 자리 잡은 무슬림의 마지막 근거지 그라나다 왕국을 공격했다.
당시 그라나다의 지배자는 물라이 하산이었다. 1482년 7월, 왕의 장남 보압딜이 아버지의 원정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스스로 왕에 오른 그는 무모한 군사원정에 나섰다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에게 체포되고 만다. 자신의 안위를 보장 받는 대가로 왕국 대부분을 스페인에 넘기기로 협정을 맺었다. 이후 풀려난 보압딜은 아버지를 상대로 싸웠고, 아버지 사후에는 삼촌 엘-사갈과 싸웠다. 그라나다 동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용맹한 자' 엘-사갈은 카스티야 - 아라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영토를 모두 넘기고 북아프리카로 자진 망명했다. 이리하여 그라나다 왕국은 수도 그라나다 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카스티야-아라곤 왕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마침내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 시의 성문도 열리며 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이슬람 세력의 최후 보루가 무너지고 말았다.
알람브라, 빛과 공간 그리고 물과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면서 나그네들을 맞이한다. 사방에서 흩날리는 꽃향기는 후각을 자극하고 분수에서 뿜어져나오는 물소리는 청각을 때린다. 시원한 바람은 피부를 간질이며 촉각을 일으켜 세운다. 헤네랄리페의 분수는 오늘도 지친 여행객들에게 청량한 기운을 제공해준다.
저자 송동훈이 안내하는 '21세기 그랜드투어'는 여행을 통해 세계사를 배우고, 세계사를 통해 여행을 즐기는 프로그램이다. 역사가 시작되고 문명을 꽃피우며 아름다운 예술이 탄생한 그 역사적인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그 현장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나아가 미래를 생각하도록 질문을 던진다. '100년, 20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