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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 점프하다
권소정.권희돈 지음 / 작가와비평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점점 아날로그 추억들을 먼지 속에 묻어 버린다. 빛 바랜 졸업 앨범을 들춰보면 그리운 얼굴과 함께 그 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찢어진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가는데 뒤따라오며 우산을 받쳐주던 마음씨 고운 순이, 감을 따겠다고 용감하게 나무위에 올랐다가 떨어져 팔을 부러뜨린 돌이, 이웃 동네와 투석전을 벌일 때 맨앞에 나섰다가 눈에 피멍이 들었던 짱구도 모두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 연필에 침 발라가며 꾹꾹 눌러썼던 '부모님전상서', 크리스마스 씰을 붙여 국군아저씨에게 보내던 '위문편지', 사진만 보고 사귀던 펜팔친구에게 보내던 '연애편지', 군에 입대해서 처음 부모님에게 보내던 '안부편지' 등은 아날로그 시대의 소중한 추억들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아날로그 감성을 일깨워주는 책이 있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의 글을 통해 세대간의 차이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 유학 다녀온 딸은 전공인 미술을 살려 책 곳곳에 예쁜 그림들을 싣고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책을 펴내며
아버지와 딸이 함께
이 책을 펴내기로 한 순간부터
아버지는 딸을 다시 발견하고
딸은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였습니다.
도서 제목이 독특하다. 구더기 점프하다. 난 구더기가 점프 하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구더기는 여름철 시골 화장실에서 많이 보는 흉물스러운 애벌레다. 연노란 색갈을 띠고 고물고물 기어다니는 모양이 하도 징그러워 신발에 밟힐까 봐 피해다니던 그런 벌레다.
파리는 알에서 애벌레, 번데기를 거쳐 파리로 변태한다. 즉 네 번의 탈바꿈을 해야 한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자손을 보존하려는 그들의 지혜는 놀라울 따름이다. 파리는 호박꽃에 알을 낳는다. 꽃이 수정하여 열매를 맺으면 알은 자연히 열매의 중심부에서 애벌레로 변태한다. 구더기가 열매 속에 살면 그 부분은 썩게 마련이다. 썩어서 약한 부분을 뚫고 나와 번데기가 되고, 이후 파리가 되어 날아오르게 된다.
택배가 왔다. (중략) 아내는 호박죽을 한다며 곧바로 단호박을 쪼개기 시작하였다. (중략) 첫번째 호박을 갈랐다. 그런데 때깔 좋은 황토 빛 속살에 호박씨는 한 개도 보이지 않고 구더기가 바글바글 슬었다. (중략) 갑자기 열린 세상에 눈이 부시었을까. 잠시 후 그중 한 마리가 힘껏 점프를 하며 호박 속에서 나왔다. 나머지 구더기들도 덩달아 점프를 하였다.
외롭고 빛바랜 플라스틱 빗과 컵
가족 .. 아빠의 일회용, 사실은 수십회용 ... 면도기
30년은 된 싸구려 녹색 플라스틱 빗.
그리고
솔이 부스스해져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칫솔들 ...
아빠는 청주대 현대문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 퇴임했다. 아마도 어느 유명 백화점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듯한 그 컵 안에는 가족들의 시간이 들어있다. 전기 면도기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하고 계속 사용하는 1회용 면도기는 안쓰럽기만 하다. 이젠 버릴 때도 되었건만 솔이 부스스한 치솔도 마치 가족인 듯 쉽게 버리질 못한다. 아니다, 버리면 안 될 물건들이다.
2년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들을 정리할 때, 나는 욕실에서 펑펑 운 적이 있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아버지를 모시고 일본으로 온천여행을 갔을 때 가정에서 사용하는 온천입욕제를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개봉도 않고 이를 욕실정리대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를 사용하고 나면 없어질 추억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추억은 함부로 버리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불빛이 아름답다
이사를 왔다. 짐을 푼 곳은 좁고 꼬불따란 골목들이
사람과 숲의 경계를 이루는
언덕꼭대기 집이다.
마치 하늘 아래 첫 지붕 밑에서 사는 것만 같다.
요즈음 우리들이 사는 동네는 대개 아파트다. 옆 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누가 이사를 드는지 나가는지 관심이 있으랴. 소위 부촌은 더 할 것이다. 그런데, 좁고 길다란 골목이 꼬불꼬불한 동네는 일반주택이다. 비록 가난할 지언정 정이 있는 곳이다. 노인들의 기침소리, 아이들의 투정소리, 부부가 다투는 소리 등 사람 냄새가 넘친다. 인기척이 스칠 때마다 뿌연 빛을 내뿜는 전봇대조차 정겹다. 가난한 불빛이 더 아름답다.
내 인생의 양념들
요리할 때 달콤한 설탕만이 쓰이는 것은 아니다.
쓴맛, 짠맛, 단맛, 신맛, 매운맛,떫은 맛.
부엌에 있는 갖은 양념들을 보다가 엉뚱하게도
내 인생에 쓰디 쓴 맛을 보게 해준 사람들이 생각날 때가 있다.
살다 보면 인생에 단맛을 준 사람보다 쓴 맛을 보여준 사람이 생각난다. 더구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처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속이 더욱 쓰리다. 회사의 자금업무를 맡겼더니 믿었던 책임자가 돈을 횡령하고 해외로 도주해버렸다. 가정 방문을 했더니 남편은 가출 중이고 별거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는 아내의 말이 돌아서는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다양한 양념처럼 내 인생에도 골고루 맛이 베여야 할 것 같다.
비교적 허물없는 부녀지간이었지만 출간 작업을 하면서 자주 대화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비판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딸의 그림은 아버지의 감각이라는 필터를 통과해야 했고, 아버지의 글은 딸의 감각이라는 필터를 통과해야만 했다. 포탈사이트 마이클럽에 딸 권소정씨의 글과 그림이 연재되면서 독자들과의 소통과 공감이 인기를 끌면서 결국 이 출간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