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 김별아, 공감과 치유의 산행 에세이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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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모양을 한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백두'는 백두산白頭山의 '백'자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의 '두'자가 합쳐진 이름이다. 따라서, 백두대간의 남측구간의 종주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해야 한다. 작가 김별아는 지난해 백두대간을 완주한 '이우학교 백두대간 종주 6기 팀' 출신이다. 2010년 3월 13일에서 2011년 10월 22일까지 장장 20개월간 총 39차에 걸쳐 약 750km에 이르는 길을 완주했다.

 

그녀는 종주 8기 팀을 응원하려고 후배들을 위해 지원 산행에 나섰다. 이 때 지리산은 산불 방지 입산 통제 기간인지라 부득이 출발은 지리산의 이웃인 고남산에서 시작했다. 작년 종주 산행을 할 때는 옆도 뒤도 돌아볼 여력이 전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앞선 이의 꽁무니뿐이었다.

 

동네 뒷산도 오르기를 꺼려하던 그녀가 마흔 살의 몸으로 9시간 동안 약 16km의 산길을 걸을 때 고통의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난산'이라는 별칭이 붙은 높이 846m의 고남산古南山을 올랐을 때의 기억은 지금의 그녀에게 있고도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이 산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대신 산을 타줄 수는 없다. 굳이 하자면 등에 업고 산행을 해야하는데 이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로지 '온몸으로 온몸을 밀어'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더우면 땀을 흘리고 추우면 몸을 떨면서 걷는 것이다.

 

이 높디높은 산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그들이 바다에서 솟아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없이 깊은 심연에서 더없이 높은 것이 그 높이까지 올라왔음에 틀림없다.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고통을 견뎌내며 산을 타는 일은 높은 만큼 깊고, 깊은 만큼 높은 이치를 깨닫는 일과 같다. 오르막길을 기어오르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내리막길을 빨리 내려가면서도 자만하지 않기 위해서는 차라투스트라의 말 "정상과 심연은 하나" 임를 기억해야 한다. 절망과 희망, 죽음과 삶, 고통과 희열은 애초부터 둘이 아니었다. 자, 김별아 작가를 따라 함께 산행해보자.

 

 

 

 

 

천왕봉에서 성삼재까지

 

위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코스: 중산리 탐방센터 ~ 벽소령 대피소 (1일차)

        벽소령 ~ 성삼재 (2일차)

거리: 1일차(16.6km), 2일차(17.5km)

시간: 1일차(12시간 30분), 2일차(8시간 30분)

날짜: 2010년 11월 13 ~ 14일(17차 산행) 

 

지리산은 별들의 고향이다. 높고 외롭지만 구김살 하나 없는 말긋말긋한 별들이 우리를 향해 양팔을 한껏 벌리고 있다. 민족의 영산, 어머니의 산, 항쟁의 산 등등 붙은 이름도 많다. 1박 2일의 여정이라 먹거리와 입을거리가 꽉찬 배낭이 무겁기만 하다. 3대에 걸쳐 덕을 쌓지 못하면 지리산의 10경인 '천왕 일출'은 구경 못한다는 말이 있다. 또한, 아무나 감히 함부로 오지 말아야 할 산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은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만든다.

 

34km의 거리를 장장 21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산행이 끝났다. 산기슭의 산채비빔밥집에 모여 앉아 다시는 오지 않을 거란 말을 하지만 해냈다는 생각에 모두 감격스러워 한다. 아이글이 쓴 산행 후기에는 유난히 '별'에 대한 글이 많다. 북두칠성을 이렇게 완벽하게 본 적이 없다는 아이의 말처럼, 다시 오른다면 일출보다 별 보러 가는 산행을 택해야 할까 보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마시고 

 

 - 이원규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중에서

 

 

산풍령에서 덕산재까지

 

위치: 경남 거창군 고제면 ~ 경북 김천시 대덕면

코스: 신풍령 ~ 삼봉산 ~ 소사고개 ~ 삼도봉 ~ 대덕산 ~ 덕산재

거리: 15.2km

시간: 7시간 30분

날짜: 2010년 11월 27일 (18차 산행)

 

'산 넘어 산'이란 말을 우린 자주 한다. 인생의 고비 고비가 많기 때문이리라. 갈수록 어려운 지경에 놓이는 우리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큰 산'인 지리산을 넘었다고 산행을 얕보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산이란 작고 낮아도 쉽지 않은 법이다. 산행을 하면 우린 겸손을 배우게 된다.

 

비인지 우박인지 진눈깨비인지 하늘에서 물기가 떨어진다. 어느새 물기가 스며들어 배낭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이번 산행의 삼봉산에서 덕산재 구간은 바로 덕유산 국립공원 지역이다. 겨울의 길목에서 맞는 비는 뼛속까지 냉기가 파고들었다. 눈에만 보이는 가짜 날씨에 속아 우비를 챙기지 않은 사람이 여럿이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는 교훈이다.

 

대덕산을 향해 가는 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고개를 들면 뺨따귀를 철석 때리는 성질 못된 바람 때문에 낙엽 깔린 진창길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모진 비바람에 배낭 커버가 다 날려간다. 흔들리면서 걷는다. 젖으면서 걷는다. 8시간의 산행이라고 14시간의 산행보다 쉬우란 법은 결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최선일 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빵보다 인문학" 이란 클레멘트 강좌가 한국에도 도입되어 경희대 실천인문센터의 최준영 교수가 안양교도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문학을 가르칠 때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가 바로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었다. 그들은 따가운 외부의 눈총보다 더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한다. 비바람 맞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아파서 더욱 소중한 꽃이다. 

 

 

김별아 작가와 함께 한 백두대간 산행은 2011년 10월 22일 대간령에서 진부령까지 14.3km의 구간을 우중 산행으로 끝을 맺는다. 17차 산행을 시작으로 39차 산행까지 약 11개월 간의 여행은 아름다운 시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다. 아울러 적절하게 인용된 시는 마치 일류기업의 적재적소 인사원칙처럼 그곳에 있었다. 

 

젊어 한창때

그냥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기쁨이거든

여름날 헐떡이는 녹음에 묻혀들고

중년 들어 간장이 저려오는 아픔이거든

가을날 울음빛 단풍에 젖어들거라

 

 - 박재삼 <산에서>중에서

 

 

나는 주말이면 대개 산에 오른다. 내가 함께 데려가려고 애쓰는 후배가 한 명 있다. 왜냐하면, 이 친구는 "선배님,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오르세요?"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오를 때의 산과 내려올 때의 산이 다르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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