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무대를 만들다 - 뮤지컬 신화 박명성, 열정과 도전의 공연기획 노트
박명성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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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판에 뛰어든 지 벌써 30년의 인생, 뮤지컬 <맘마미아>의 흥행 돌풍을 몰고온 박명성은 소위 '쟁이'다. 그에게는 '최고의 뮤지컬 프로듀서', '뚝심의 연극제작자' 등 수식어를 달고 다는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공연예술쟁이'다.

 

1982년 그는 배우로 연극계에 입문했지만 배우로서 재주가 없었다. 이후 극단 신시의 멤버가 되어 연출가로 나섰지만 이 또한 '젬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시골로 잠시 낙향했다가 다시 오기를 갖고 상경하여 기획자가 되어 줄곧 극단의 궂은 일을 도맡았다.

 

 1999년 그는 신시뮤지컬컴퍼니의 대표를 맡아 진정한 프로듀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더 라이프>, <맘마미아>, <아이다>, <시카고> 등 초대형 뮤지컬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그의 작품은 많은 관객을 몰고 오면서 공연계의 중심이 되었다.

 

프로듀서는 단순히 공연만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이 아니다. 재원 조성, 사람 관리, 극장운영, 캐스팅, 홍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지는 '한 작품의 총 사령관' 또는 '총체적 디자이너'인 셈이다. 한 작품을 올리기까지 많은 고난과 역경이 뒤따른다. 

 

 

 

 

 

그는 프로듀서가 가장 유념해야 할 사항이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기획이고, 기획이 사람인 것이다. 모든 작품이나 콘텐츠는 사람에서 시작하여 사람으로 끝난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프로듀서는 바로 '사람을 경영하는 자'이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공연에 얽힌 비화와 숨은 이면을 살짝 들춰보기로 하자.

 

 

엄마를 부탁해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첫 문장을 읽으면 누구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메세지는 마치 중세 종교시대에 '지구가 돈다'는 말에 버금갈 정도이다. 관객들은 공연 내내 울고 공연이 종료된 후에도 울먹거렸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본디 극단 스태프들이었다. 이들이 둘러앉아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연극으로 각색해보자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독백이 많고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없다는 문제점 때문에 무대로 옮기기엔 매우 어려운 스타일이었다.

 

'해보고는 싶은데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우선 출판사에 연락하여 라이선스 취득이 가능한지 점검부터 했다. 이 소설은 이미 장기간 베스트셀러였기에 이미 열 군데가 넘는 회사에서 영화, 방송, 뮤지컬, 연극 등을 제작코자 저작권 신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이를테면 그의 회사는 막차를 탄 셈이었다. 운좋게 신경숙 작가가 출판사에 그를 포함시켜 심사하라는 요청 덕분에 저작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이젠 극본을 쓸 작가를 찾는 것이 필요했다. 극단 미추에 협조를 구하여 고연옥 작가를 섭외했다. 신경숙 원작자는 이제 소설을 떠나 연극으로 가는 거니까 알아서 해달라고 부탁하며 특별한 간섭이나 조건이 없었다. 단지 둘째 딸이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엄마가 준 감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넣어주면 좋을 것 같다는 것 뿐이었다. '반드시'가 아니라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역시 대작가다웠다.

 

이후 방송 일을 오래하신 고석만 선생이 연출을 맡고, 출연 배우도 그 선생과의 인연으로 결정되었다. 백성희 선생, 박웅 선생, 심양홍 선생 등이 출연을 결정해 주셨다. 결국 출연하지 않은 배우 정보석이 캐스팅에서 가장 애를 먹였다. 제일 먼저 엄마 역에 캐스팅된 정혜선 선생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달을 혼자서 연기해서 감동적이었다.

 

공연은 유례 없는 대성공이었다. 두 달에 600석이 넘는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의 좌석이 거의 매진되다시피 했다. 약 11억원의 티켓 세일을 했는데, 연극에선 전례가 거의 없었다. 매진 사례를 이어가는 중에 관객들과 공연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공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장면이 많고 정리가 덜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느 작품이든 완벽할 수는 없다.

 

서울에서의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지방의 기획사, 극장관계자 등 10여 곳에서 공연요청이 쇄도했다. 지방공연의 성공이 충분히 가능성 있었지만 배우들의 스케줄이 문제였다. 오히려 재공연을 준비했다. 역시 엄마 역할의 캐스팅이 관건이었다. 손숙 선생에게 부탁하자 쾌히 응했다. 큰 딸 역은 김여진과 허수경이 맡았다. 당초 김여진에게 부탁했지만 답이 없어 난감해하자 손숙 선생이 허수경을 섭외했다. 이후 김여진이 자기가 반드시 큰딸 역을 맡아야 한다고 해서 더블 캐스팅이 되었다. 

 

재공연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용극장에서 2010년 10월 30일부터 12월 31일까지 계획을 잡았다. 용극장은 800석 규모의 대극장이었다. 11월엔 객석의 반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홍보를 강화했다. 꾸준히 관객이 늘더니 12월엔 빈자리가 없었다. 초연보다 더 많은 공연수익을 거두었다.

 

뮤지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음악이다. 뮤지컬에 열정적인 김형석과 박칼린을 만나, 뮤지컬로 무대로 올려보자고 상의했다. 김형석은 작곡을 맡고, 안무는 김성일, 엄마는 김성녀 선생이 배역으로 결정되었다. 뮤지컬은 성공적이었다. '미안하다'고 노래할 때는 객석이 눈물바다였다. 그는 외국 스태프들과 함께 뮤지컬을 만들어 '새로운 엄마'를 탄생해보고자 한다.

 

 

맘마미아!

뮤지컬 역사를 다시 쓰다

 

2004년 초연된 <맘마미아!>는 지방인 대구로 공연차 내려갔다. 지방공연 사상 최장기공연에, 객석 점유율 90퍼센트라는 기록을 세웠다. 대구의 장기공연에서 성공한 것은 공연계의 화제였다. <맘마미아!>는 무대장치에만 2주가 걸리고 철거시에도 며칠이 걸린다. 소도시는 관객인프라가 적어서 주말 4회 정도 공연이 고작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공연계에도 불똥이 튀었다. 효율성을 제고해야 할 즈음에 런던의 오리지날 공연팀이 투어장치를 개발하여 유럽 맘마미아 공연에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장 4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투어장치를 구입했다. 서울에선 오리지날 장치를 사용하고 지방공연 때엔 투어장치를 쓸 생각이었다. 준비를 끝내고 전국에 홍보했다.

 

"<맘마미아!>가 1년 동안 지방투어를 한다!"

 

이에 지방의 방송사, 언론사, 그리고 공연기획사에서 서로 자기네 쪽에 와달라고 요청했다. 2010년 5월 대징정의 막이 올랐다. 경기도 이천 도자기 축제 기간을 겨냥했다. 900석 극장에서의 일주일 공연 내내 미어터졌다. 이후 창원, 대구, 광주, 부산, 울산, 의정부, 인천, 수원, 일산, 과천, 안양, 목포, 안동, 청주, 대전, 구미, 제주 등 전국 23개 도시를 돌았다. 모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국민 뮤지컬로 자리매김 했다.

 

2011년 4월 제주를 끝으로 1년간의 지방투어가 끝나고, <맘마미아!> 팀은 신도림 다큐브아트센터에서 6개월간 208회의 공연으로 2011년의 대장정을 마감했다. 신도림은 지역적으로 문화의 불모지, 문화의 소외지역으로 평가받는 곳이라 더욱 의의가 크다. 신도림을 '신 드림'으로 만들자는 포부가 고희경 극장장과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이 극장은 과거 연탄공장의 자리였다. 2011년 12월 10일, 1,000회 공연을 돌파했다. 한국 뮤지컬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프로듀서로서 연극과 뮤지컬을 넘나들면서 제작시스템의 확립과 공연의 예술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한 그의 도전 정신은 한마디로 '세상에 없는 무대를 만들다'이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2001)', '올해의 프로듀서상(2007)',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2010)' 등 많은 수상을 기록했다. 앞으로도 창조예술산업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예상되는 그의 향후 행보가 매우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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