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세상을 더듬다
저우쭝웨이 글, 주잉춘 그림, 장영권 옮김 / 펜타그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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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쳤다. 맑고 깨끗한 하늘을 보려고 산책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동네 개천길 옆 산책로는 지난 밤 내린 비의 흔적들로 지저분하다. 개천길 산책로를 피해 다시 언덕을 올라 학교길로 접어드는 순간 길바닥에 달팽이들이 지천으로 늘려있다. 이 놈들이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다행인 것은 이 길은 여학생들 등교길이라 차가 다니지 않는다. 또한, 오늘은 일요일이라 학교도 휴무다. 누가 뭐라든 느릿느릿 제 갈 길로 한걸음 한걸음 달팽이는 기어간다. 지켜 보는 내 마음이 더 무겁다. 혹 자전거라도 지나간다면 영락 없이 비명 횡사수에 걸리기 십상이다.

 

이 책은 주잉춘의 이미지 작업과 저우쭝웨이의 글이 만나서 탄생한 작품이다. 두 사람은 이미 <나는 한 마리 개미>란 작품으로 국내에 알려진 작가들이다.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달팽이는 뭔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유쾌한 성찰의 기회를 만들어준다.

 

"내 이야기가 궁금하더라도 참고 기다려야 해요.

서두르다간 내 모습을 지나치고 말 테니" 

 

 

 

 

이 책이 돋보이는 이유는 달팽이를 기르며 관찰하는 데 1년, 그림 작업에만 1년, 그리고 편집과 디자인, 제작 등에 걸린 시간이 또 1년. 특히 잠자리 한 마리 그리는데 꼬박 이틀이 걸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리다 보니 완성하기까지 3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치 작가들이 달팽이가 된 느낌이다.

 

"느리다 느린 걸음걸이.

게으름 피우는 건 결코 아니고

연약한 몸으로 태어났기에

껍데기를 등에 지고 천천히, 천천히 기어갈밖에."

 

길 위에 나선 달팽이를 따라가며 이 책은 시작된다. 습관처럼 굳어진 느린 걸음걸이. 길을 걷는다는 건 이토록 무미건조한 일이지만, 멈춰 서면 오히려 더 갑갑해. 길가에 펼쳐진 찬란한 풍경에도 내 마음은 늘 갈피를 잡지 못한다. 느리게 살라는 조상들의 가르침은 이미 DNA로 내 몸에 각인되어 한 점의 의문도 가져본 적이 없다. 길에서 만난 동료는 무참히 밟혀 찌부러져 있다. 덜덜 떠는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한다. '느림'은 그를 구해주지 못했다. '산다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했다. '느림'이 아니라면 '빠름'이 진리일테지.

 

'빠른 삶'을 살자고 맘먹었더니 개미, 애벌레, 무당벌레 등등, 주위엔 온통 빠른 선수들이다. 그렇지. 말벌은 이들보다 더 빠르다. 입이 딱 벌어지는 말벌의 비행술. 아차 너무 빨라서인가? 거미줄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휴, 느린 나는 오히려 다행이다. 차라리 느리니까 좋은 점을 생각해 봐야겠다.

 

다시 느릿느릿 나아간다. 신음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달팽이가 쓰러져 있다. 깨진 껍데기 속을 헤집고 개미들이 살점을 물어뜯는다. 불쌍한 할머니 맥없이 당할 뿐이다. 위로의 말을 전했다. 우리는 위로의 말로 관심을 표현한다. 위로란 남을 속이는 일이요, 자신을 기만하는 일임을 알지만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다.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늙은 달팽이. 느림을 탓할 게 아니라 느려서 생겨난 나약함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속이 텅 빈 매미 허물의 날카로운 발톱에 할퀴고, 분을 삭이며 가다보니 집게벌레의 주검을 만난다. 몸집이 크지만 전혀 두렵지 않다. 지금은 개미에게 뜯어 먹히는 신세일 뿐이다. 휴식을 취하려 잎사귀 그늘에 들어갔다. 하늘에서 날아온 뿌연 안개. 농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경계 태세 돌입. 껍데기 속으로 몸을 숨기려는데 쥐며느리가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 뒤집어진 채로 바둥거린다. 더듬이를 뻗어 당겨주었다. 뒤집기에 성공한 쥐며느리는 친구가 되었다. 농약 때문에 숱한 곤충들이 죽었다. 살아남은 우리는 감사할 일이 뭔지 깨달았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가 그칠 줄 모른다. 밤이 찾아왔다. 칠흑같은 어둠 속. 빗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음이 이리도 가까운 곳에 있음을 처음 느꼈다. 시간이 한 백 년쯤 흐른 것 같았다. 마침내 폭우가 멎었다. 비 갠 밤은 한없이 아름다웠다. 황홀한 광경에 넋을 빼앗겼다. 그건 반딧불이의 불빛이었다. 그들은 달팽이의 천적, 꼼짝 않고 지나가길 기다렸다.

 

"불쌍하게도 사람들은 자기가 너무 '느리다'고 마뜩잖아 한다.

무슨 수를 써서든 조금이라도 '빨리'하려고 한다.

자동차를 발명했으나

그들이 미처 몰랐던 건,

차가 암만 빨라도 저 우주의 '무상'을 앞지르진 못한다는 거다.

나는 이렇게 살아남았지만

저 빨리 뛰는 생명들은 오히려 피해를 모면하지 못했다.

재난 앞에서,

뜻밖에 그들은 느림보 달팽이만도 못했던 거다.

대자연의 이 농담 같은 현실은 아무래도 너무 심했다"

 

큰물이 빠져나가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천천히, 천천히 기어갔다. 견딜 수 없이 외로워도 여전히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가진 게 없을 때라도 세상 만물을 선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다. 평안함. 그게 바로 행복이다.

 

만慢

나는 계속 느릿느릿 길을 걸었다.

마음 가는 대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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