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카프카의 <변신> 중에서

 

 

저자 박웅현은 제일기획을 거쳐 현재 TBWA 코리아에 근무하는 광고업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생각이 에너지다>, <진심이 짓는다> 등의 히트작들이 있다. 그가 만든 광고 한 편을 들여다보자. 어느 아파트의 30초 짜리 광고이지만 그 울림은 정말로 깊다.

 



한국광고학회가 주최하는 ‘올해의 광고상’에서 TBWA코리아가 제작한

대림산업 e편한세상 ‘진심이 짓는다’가 대상을 받았다.

 

 

10cm, 손가락 두 개 사이의 거리,

 아파트를 짓는 사람들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거리,

하지만 좁은 곳에 주차해본 이들에게는 매우 넓게 느껴질 거리, 10cm,

좌우 10cm 더 넓은 주차 공간, 고집스런 생각이 만드는 차이, 10cm 진심. 

 

  
그는 머릿속 도끼질의 흔적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경기창조학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11년 2월 12일부터 6월 25일까지 약 4개월 동안 학생들에게 인문학 강독회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독서법을 강의했는데, 이 책이 바로 그 강의의 산물이다. 이제 그의 쾌도난마 같은 도끼질을 따라 가보자. 그리고 그 울림을 기꺼이 공유해보자. 

 



 

판화가 이철수의 판화집 <산벚나무 꽃피었네>, <마른 풀의 노래>, <이렇게 좋은 날> 세 권으로 강독을 시작한다. 이철수는 본디 민중판화를 했다. 독재정권 시대에는 다소 거친 느낌을 풍기며 선이 굵었다. 이후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작품 속에 마치 선가(禪家)의 짧은 경구 같은 글을  선보였다.

 


 


 

깊은데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개가 짖어도

법문이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이철수의 책들은 평소에 못 보던 것을 보게 해주고, 인간 중심으로만 세상을 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저자도 이철수의 판화집을 통해 짧은 텍스트에 먼저 마음을 빼앗기고 또한 안정감 있고 정돈된 레이아웃에서 힌트를 얻어 풀무원 지면 광고를 만들었다. 이철수의 작품에 여백이 많은 것을 그대로 원용하여 콩 하나만 놓고 주변을 여백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콩입니다. 안 까지 잘 보실 수 있도록 반으로 잘랐습니다. 혹시 이 콩이 유전자 변형을 했는지, 보이십니까? (30 쪽)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32 쪽)

 

소설가 최인훈은 <광장>에서 '늙은 군인이 훈장 자랑하듯', '삶은 실수할 적마다 패를 하나씩 빼앗기는 놀이다', '몸은 길을 안다' 등 산문 곳곳에 운문 같은 문장을 배치함으로써 소설을 시처럼 썼다. 그런데 김훈의 글 '인간은 기본적으로 입과 항문이다' 를 읽노라면 우리를 완전히 동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마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지하 20층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현기증을 맛보게 한다. 이런 맛을 느끼려면 '다독 콤플렉스'를 버리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어느 음악학교, 여기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악기연주를 시키지 않고 그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자연의 음들을 들려준다. 바닷가에 가서 큰 돌과 큰 돌이 부딪치는 소리, 큰 돌과 작은 돌이 부딪치는 소리, 파도 치는 소리를 들으며 음에 관해 얘기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신동들은 어릴 적부터 연주 기술을 배우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시이불견 청이불문 視而不見 聽而不聞

 

시청視聽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견문見聞은 깊이 보고 듣는 것이다.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지겹다고 하는 것은 시청의 수준이고, 사계의 한 대목에서 소름이 돋는다면 이는 견문의 경지이다. 헬렌 켈러는 자신이 대학 총장이 되면 '눈 사용법'이라는 강의를 필수과목으로 개설하겠다고 했다.

 



 

헬렌 켈러의 에세이<삼 일만 볼 수 있다면>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숲을 다녀온 사람에게 뭘 보았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별거 없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슾에서 느낀 바람, 자작나무와 떡갈나무 몸통을 매만질 때의 다른 느낌, 그리고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등을 다른 사람들이 왜 못 보고 못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김훈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훈은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부터 필명을 날리다가 비교적 늦은 47살에 등단하여 2001년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김훈의 글은 한 문장 한 문장을 깊이 있게 읽어야 한다. 줄을 치고 또 쳐도 마음을 흔드는 새로운 문장들이 넘쳐나는 것이 김훈의 글임을 강조하면서 먼저 <자전거 여행>을 중심으로 강의를 시작한다.

 


 

 

저자는 김훈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자전거 여행>에서 발견한 된장과 인간과 냉이의 삼각 치정관계에 관한 구절을 읽으면서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면 향이 강한 냉이와 된장이 입안에서 싸우기 때문에 삼각 치정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 표현이다. 우리도 삶의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어 새로운 것을 들여다보는 여유로운 시간을 갖자.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관계이다. (80 쪽)

 

국 한 모금이 몸과 마음 속에 새로운 천지를 열어주었다. 기쁨과 눈물이 없이는 넘길 수가 없는 국물이었다. (83 쪽)  

 

 
또한, 시집에서부터 인문과학에 이르기까지 박웅현의 독서 스펙트럼은 넓다. 시인 고은의 <순간의 꽃>,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손철주의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오주석의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등으로 그의 강연을 이어간다.

 





강의 교재로 채택된 많은 책들을 흥미롭게 설명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사고의 확장을 이룰 수 있다. 이런 해석을 해보지도 않고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읽었던 나의 독서 방식에 회한이 밀려왔다. 감동적인 문장에 줄을 치고 옮겨 적고, 도식화한 강독회 메모를 책 속에서 발견하고선 언젠가 기회가 오면 그의 강연회에 꼭 참석해보자는 각오도 생긴다. 창조는 결국 볼 견見에서 출발한다는 그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광고계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책 꼭 한번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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