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마리턴 Puma return - 사망선고 브랜드의 화려한 부활 전략 브랜드 인사이트 시리즈 3
롤프 헤르베르트 페터스 외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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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 다슬러(왼쪽) 루디 다슬러 형제. 두 형제는 각각 아디다스와 푸마를 만든다



 

성공적인 올림픽 때문에 운동화 사업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던 다슬러 형제는 제 2차 세계전쟁이 끝난 1948년 갈라서게 되었다. 형 루돌프가 나치 친위대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동생 아돌프가 미군에 밀고했고, 이로 인해 사이가 나빠지면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48년 형 루돌프는 새로운 회사인 '푸마(PUMA)'를 설립했고, 1949년 동생 아돌프는 자신의 애칭인 아디(Adi)와 자신의 성 다슬러(Dassler)에서 Das를 따와 '아디다스(ADIDAS)'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형제의 싸움으로 작은 마을 헤르초겐아우라흐는 베를린 분단의 축소판인 양 둘로 분열되었다. 푸마가 먼저 앞서 나갔지만 이후 아디다스는 반격에 성공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 2:0으로 서독을 이기고 있던 헝가리가 갑자기 내린 비에 미끄러지며 당황해 했다. 반면, 서독은 우천을 대비해 스터드의 길이를 조절하며, 미끄러짐을 막을 수 있는 아디다스의 축구화를 신고 있어서 기적같은 3:2 역전극을 연출했다.

 



영화 <베른의 기적> 중에서

 

서독의 우승으로 덩달아 아디다스의 브랜드 가치도 푸마를 넘어서게 되었다. 아디다스에 선두를 내준 푸마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강력한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월드컵 결승전, 경기 전 펠레는 주심에게 양해를 구하고 축구화 끈을 다시 묶었다. 푸마의 폼 스트라이프 로고가 선명한 축구 황제 펠레의 축구화가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푸마에 큰 수익을 가져다 준

축구황제 펠레의 축구화는 

계속해서 '아디다스'의 공을 차고 있었다.

 

브라질의 우승으로 월드컵이 막을 내린 이후, 푸마의 매출은 수직 상승하였다. 하지만 푸마의 반격은 이미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던 아디다스를 꺽지는 못했다. 아디다스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텔스타'라는 공이 공식구로 사용되는 영광을 얻었고 이후 계속해서 FIFA로부터 월드컵 공식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1974년 아버지 루돌프가 죽자 장남인 아르민 다슬러의 시대가 도래했다. 초기엔 그는 회사를 돌보며 직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등 훌륭한 경영자로 평가 받았다. 이후 그는 동생인 게르트 부사장을 축출시키려 하는 등 거만한 독재자로 변해갔다. 결국 얼마 되지 않아 푸마에 경영위기가 불어닥쳤다. 아르민과 게르트 형제는 회사 적자를 만회하려고 자신들의 지분을 담보로 후순위 대출을 받아 회사에 쏟아부었다.

 

다슬러 형제는 6,200만 마르크의 돈을 빌린 대가로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도이체방크 대표에게 푸마의 지배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도이체방크는 푸마의 주채권자로서 회사를 장악하고 경영을 맡았다.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은 새로운 임원진을 구성하고 직원을 교체하는 일이었다. 도이체방크가 경영권을 쥐고 나서부터 무려 6년 연속 하락세를 계속했다. 도이체방크가 경영에서 물러나기까지 푸마는 오랫동안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있었던 셈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이키와 리복에 밀려 한때 사망선고까지 받았던 푸마가 재도약 할 수 있었던 것은 1993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CEO 자리에 오른 요헨 차이츠 덕분이다. 그는 푸마를 글로벌 브랜드로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신뢰하는 동료들과 드림팀을 만들어 푸마의 현 상태를 점검했다. 이후 명품 유럽 스포츠 브랜드로 도약한다는 목표와 함께 시대에 걸맞는 디자인과 우수한 품질을 갖춘 레져용품으로 성장한다는 중점 추진사항을 수립했다.

기존의 마케팅 방식과는 달리 유행하는 트렌드 세터와의 공조를 위해 마돈나가 신고 나온 푸마 신발을 한정판으로 구성하거나, 영화 '시티 오브 엔젤'에 푸마 운동화가 등장하게 하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또한 패션과 디자인 상품 개발에도 주목했다. 독일 디자이너 질 샌더, 프랑스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나 필립 스탁, 영국의 비비안 웨스트우드, 일본의 미하라 야스히로 등과 협력해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카메룬 민소매 유니폼
카메룬 민소매 유니폼


 

가능성 있는 무명선수들을 후원하는 스포츠 마케팅에도 주목했다. 우사인 볼트뿐 아니라 테니스 선수 보리스 베커, 슈테피, 세리나 윌리엄스 등도 푸마가 발견한 선수들이다. 특히 푸마는 아프리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카메룬 축구 대표팀을 지원하기 시작한 푸마는 선수들에게 다양한 색깔의 축구화와 소매 없는 유니폼을 보냈다. 민소매 유니폼은 이전에는 없는 디자인이었다. 이 옷을 입은 카메룬 대표팀은 2002 네이션스컵에서 승전보를 울리며 맹활약했다. 그러나 카메룬 팀의 튀는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긴 국제축구연맹(FIFA)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민소매 유니폼의 착용을 금지시켰다.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0미터에서 우승한 우사인 볼트


1990년에 요헨 자이츠가 푸마의 항해키를 잡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 성장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1센트조차 푸마에 투자하라고 권유하는 애널리스트도 없었다. 푸마의 제품은 가판대나 아울렛에 쌓여 있었다. 오랜 전통의 푸마는 파산 직전에 몰려 있었다. 라이벌 아디다스와의 맹목적인 전쟁으로 녹초가 된 지 오래였다. 푸마 경영진들은 흑자 달성에 대하여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차이츠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사망선고를 받은 브랜드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푸마의 이야기는 수많은 경영인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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