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리치 패밀리 - 로스차일드 250년 부의 비밀
요코야마 산시로 지음, 이용빈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하나로 묶인 다섯 개의 화살이 새겨진 문장紋章의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지고 그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벌도 없을 듯하다. 19세기에 유럽의 정치와 금융을 움직인 로스차일드 가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적인 규모의 사업을 펼치면서 불사조의 명성을 날리고 있다. 250년이 넘는 이 가문은 아버지와 다섯 아들의 일화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1743~1812)는 임종을 앞두고 다섯 아들을 불러 모았다. 하나로 묶인 다섯 개의 화살을 이들에게 보이며 이와같이 절대로 흩어지지 말고 한데 힘을 모아 기업을 발전시켜 나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다섯 형제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굳게 결속하여 유럽에서 최대의 금융강국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낱 영세한 고물상이자 환전상인 로스차일드가 세계적인 재벌이 된 것만으로도 이는 흥미롭다. 활시위를 떠난 다섯 개의 화살처럼 로스차일드 가문의 다섯 형제는 프랑크푸르트를 근거지로 시작해 런던, 파리, 비엔나, 나폴리 등 주요 도시로 옮겨 각자의 거점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때로는 나폴레옹의 라이벌인 웰링턴 장군에게 군자금을 보내고, 때로는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를 통해 금융 경쟁업자들을 꺾어나갔다. 그 결과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왕족들도 시샘하는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는 정보를 누구보다도 더 빨리 입수하여 주식시장에서 엄청난 폭리를 취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한 시오니스트의 맹주' 혹는 '국제금융을 지배하는 숨어 있는 권력의 실체'라는 다양한 평가를 받는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경을 넘어 긴밀한 협력관계의 구축과 함께 신속하고도 넓은 정보망을 유지하면서 현재까지도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25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슈퍼리치'로서 성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 '가족 경영'이라는 원칙이 있었다. 둘째, '정보력' 즉 국제적 지식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셋째, 강화된 '네트워크 경영'으로 생존능력을 극대화시켰다. 넷째,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고난 극복력을 길렀다. 다섯째, 끊임없이 변화를 도모하면서 차별화된 성공을 거두었다.

 

"유럽에는 단지 하나의 권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 베르나 존버트의 <유대인과 경제생활>중에서

 

가족 경영, 세상을 지배하다

 

초대 마이어 암셀은 아들 다섯 외에도 딸 다섯을 낳았다. 딸들은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규벌閨閥을 확대하여 또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아편전쟁을 통해 대재벌이 되어 인도와 홍콩을 중심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바그다드 출신의 데이비드 사순 일가도 로스차일드 가문과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록펠러 가문이나 쉬프Schiff 가문 역시 결혼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가족 중심의 경영은 위험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수익을 최대화시키는 네트워크 경영의 요체가 되었다.

 

암셀 마이어의 셋째 아들 나단은 1798년 영국 맨체스터에 진출한 후 런던의 금융가를 장악했다. 이후 1811년 막내 아들 야곱은 프랑스 파리에 분가하여 독일, 영국, 프랑스를 관통하는 거점을 만들었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도 분가를 형성함으로써 유럽 전역을 커버하는 글로벌 경영 네트워크를 창출했다.

 

1863년 이탈리아 나폴리 분가가 소멸하고 1901년엔 프랑크푸르트 본가도 사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인 1938년에 비엔나 분가가 사라지면서 기존의 '5극 체제'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양극 체제'로 재편되었다. 1998년 프랑크푸르트에 유럽중앙은행이 설립되고 2007년 스위스를 중심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은행 부문이 통합됨으로써 비엔나 분가가 재건되었다. 유럽통합과 함께 로스차일드 가문은 더욱 확대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보력, 돈을 움켜쥐다

 

마이어 암셀은 유년 시절 랍비 교육을 폭넓게 받았다. 랍비 교육을 바탕으로 한 유대교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정체성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이어 암셀이 아들들을 파리, 비엔나, 나폴리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정보가 힘의 원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럽 요지에 정착시켜 유럽 전체를 통합하는 지식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것이다.

 

셋째 아들 나단이 워털루 전쟁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쌓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한다면 영국은 위기에 직면하므로 국채는 폭락하고 결국 휴지 조각이 될 처지이다. 반대로 웰링턴 장군이 승리한다면 영국 국채는 폭등할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정보망은 나폴레옹의 패배를 제일 먼저 나단에게 전했다.

 

나단은 런던 증권 거래소로 향했다. 당연히 매수를 해야함에도 그는 거구로 매도를 했다. 그가 매도하는 것을 보고 모두 웰링턴의 패배로 인지하면서 거래소는 패닉 상태에 들어 폭락을 거듭했다. 워털루의 승전보가 전래질 즈음 그는 이미 폭락할대로 폭락한 공채를 대량으로 매입했다. 정보는 돈이다. 이것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번영을 약속햇던 비밀이었다. 

 

생존 - 불사조처럼 살아남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과 미국의 록펠러 가문은 단일 국가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본가로 하되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오스트리아 비엔나, 그리고 이탈리아 나폴리에 진출하여 글로벌 경영을 실천했다. 유럽 전체를 아루르는 네트워크가 가동했기 때문에 근현대의 유럽 혁명과 전쟁 속에서도 리스크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생존 능력 덕분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단순한 부자를 뛰어넘어 슈퍼리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유럽 역사상 단일 국가를 기반으로 성장했던 다른 대부호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상호협력을 미덕으로 삼지만 경쟁에서는 반드시 이긴다는 가풍을 이어받아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또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도 깊숙히 관여했다. 모든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가문의 생존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함께 도전하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은 텔아비브 로스차일드 거리의 한 건물에서 선포되었으며, 특히 로스차일드 파리 분가는 시온주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존경받는 가문의 품격을 보여 주었다. 

 

변화 - 세상을 바꾸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슈퍼리치라는 차별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차세대 글로벌 인재의 양성, 창조적 진화, 변화를 이끄는 개척자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과의 일전, 메테르니히와의 협상, 비스마르크와의 투쟁, 히틀러와의 전쟁 등에서 보여준 가문의 모습은 끝없이 진화하는 굴곡을 잘 보여준다.

 

1901년 프랑크푸르트 본가가 사라진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쳐 런던 분가와 파리 분가라는 양극체제로 힘을 축적하며 때를 기다렸다. 1998년 유럽중앙은행을 프랑크푸르트에 설립시켜 유럽통합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최근 유럽 국가의 재정위기와 연계하여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한국과 로스차일드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과 혼맥으로 연결되는 데이비드 사순 일가가 아편 전쟁 시기를 전후로 활동했던 홍콩과 상하이에는 1865년 로스차일드 일족의 아편 무역을 더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HSBC가 설립되었다. 이 은행은 홍콩에 본점을 두고 있는데, 2009년 5월 홍콩에서 인민폐로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최초의 외국계 은행이 되었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볼셰비키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 1917년 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와중에 아관파천 등 친러시아 외교정책을 추진한 고종의 조선왕조도 마침내 1910년 일제 식민지 치하에 들어섰다.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유대계 미국 자본가 야곱 쉬프의 전폭적인 재정지원이 있었다. 물론 로스차일드 가문의 폭넓은 협조도 뒤따랐다. 

 

"5월 5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시종 구具씨가 고종과의 회동을 잡으려 했으나

일본의 치열한 방해공작으로 끝내 회동은 성사되지 못했고"

- 쉬프 일행의 일기 중에서 

 

1906년 5월 5일, 대한제국 말기의 한반도 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결정하고자 유대인 자본가 야곱 쉬프 일행은 고종을 만나려 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만약에 고종이 밀사를 헤이그가 아닌 미국의 월스트리트나 영국의 시티로 파견했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아마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청나라 외교관이 주고 간 <조선책략>을 읽으며 국내외 정세를 판단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대활약을 펼쳤던 유럽과 당시의 패권 국가인 영국에 대한 언급은 제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이어 암셀의 유훈

 

1. 기업의 중요한 위치에 가문 이외의 사람을 끌어들이지 말 것

2. 가문 가운데 기업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남자에 한함

3.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친척간의 결혼을 장려함

4. 재산 목록을 공개하지 말 것

5. 상속 재산에 대한 공적인 재산평가를 하지 말 것

6. 가문의 당주는 직계 장손 남자를 우선할 것(단, 과반수 찬성이 있을 경우 예외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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