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산을 가다 - 테마가 있는 역사기행, 태백산에서 파진산까지 그 3년간의 기록
박기성 지음 / 책만드는집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저자 박기성은 대학에 입학하여 등산을 시작한 역사학도 출신으로 등산 전문 잡지 <사람과 산>의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편집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삼국사기의 산'을 기획하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산을 찾거나 직접 산에 올라 그 현장을 관찰하고 음미하는 등 2006년 6월부터 2009년 7월까지 꼬박 3년의 세월 동안 이 일에 몰두하면서 많은 역사적 인물과 유적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이 책이 출간되었다.

 




 

 

태백산 정상에서 제사를 올린 신라 7대 왕 일성이사금,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었던 탈하이, 천 년에 한 명 나올가 말까 한 천재 전력가 이사부, 대야성 최후의 날 남편 김품석과 함께 자결한 고타소랑, '맞장 뜨기'방법으로 고비를 넘겼던 김유신 등의 인물을 소개하고 박제상은 왜 그렇게 고집부리다 왜에 처참하게 죽었는지, 광개토태왕이 보낸 고구려군 5만이 왜군의 항복을 받았던 임나가라 종발성은 어디인지, 관산성에서 성왕과 백제군 29,600명은 어떻게 해서 몰살 당했는지 등의 수많은 미스터리들도 저자는 풀어낸다.

 

또한, 유적들의 대종은 산성이다. 12년 동안  여섯 번의 싸움이 벌어졌던 대구 와룡산(성), 침전지 연못을 만들어 방어한 문경 고모산성,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본진이 머물렀던 논산 황화산성, 유럽의 성들처럼 원통형 치雉들이 있는 유일한 구조물 삼년산성, 목간이 가장 많이 출토된 함안 주산성 등 산성은 방어 진지만이 아니라 이동 진지 역할까지 했음을 알게 되었다. 행군 중 로마군은 날이 저물면 참호 진지를 만들었듯이 서라벌군은 토성을 쌓았던 것이다.

 

태백산 - 2천 년 전 시작된 산악신앙의 단초

 

서기 138년 서라벌의 7대 왕인 일성이사금이 태백산을 순행했다. 몸소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북으로는 말갈, 남으로는 가야를 물리치고 명실상부한 영남의 패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말갈의 침입을 받았고 6대 왕 지마이사금은 가야를 공격하러 낙동강을 건넜다가 대패를 당하고 귀국했던 서라벌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라벌은 경주, 울산, 영일, 청도, 양산, 동래, 경산, 영천, 대구 정도의 약소국이었다. 반면 가야연맹(알타이어語로 '가야'는 '철'을 뜻한다)은 선진 제철업과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구가 중이라 서라벌은 그 국력이 가야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또한, 뛰어난 기마 궁수 집단인 말갈족은 동해안을 타고 내려와 경계인 영일 죽령을 넘어 남침하기를 밥 먹듯 일삼는 이런 상황에서 일성이사금의 순행이 이루어졌다.

 

서라벌 사람들이 태백산을 성스러운 산으로 받드는 풍습은 혁거세(알타이어로 '족장'을 뜻한다)가 건국할 당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부전강과 동해안을 잇는 고대 교통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그때 태백산(오늘날의 백두산)의 위용을 보았고 산을 숭배하는 초원사람들의 관습대로 그 산을 영산으로 받들기 시작했다. 이후 서러벌 사람들은 진한 북쪽 끝에 또 하나의 태백산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꿩 대신 닭으로 이 산을 숭배해왔다. 2천 년 뒤 오늘날까지 이어진 산악신앙의 단초端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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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각화사 대웅전

 

각화사를 출발하여 태백산 사고史庫터에서 1박 한 다음 정상에서 두 번째 밤을 지내고 남동쪽의 청옥산으로 내려와 정상이 잘 보이는 영마루에서 1박 하는 3박 4일의 산행 계획을 잡았다. 최초로 성산 대접을 받은 태백의 위용은 청옥산에서 가장 잘 바라볼 수 있을 듯했다. 이번 산행의 목적은 그 역사적인 현장의 답사이며 그 개연성을 찾는데 있었다.

 

"마침내 풀렸어, 이사금들의 순행 미스터리가. 일성이사금은 바로 여기, 아니 천왕단까지 와 제사를 지냈던 거야. 각화사 자리에서는 입산제, 여기서는 산신제, 천왕단에서는 하늘님께 제사를 올렸던 거야" (20 쪽) 

 

토함산 - 탈하이가 서라벌을 엿보다

 

기원전 19년 서라벌 동남쪽 바닷가 아진포에 9척 거구의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탈하이脫解.  서라벌 천 년 역사상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탈하이란 몽고어로 '대장장이들'이라는 뜻이다. 그의 고백에서도 자기의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상 이들은 선진 기술을 보유한 제철 기술자 집단이었음에 분명하다.

 

"시종 두 명과 함께 지팡이를 들고 토함산으로 올라가더니 석총을 지어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 <삼국유사> 중에서

 

동천강을 거슬러 사로 6촌의 하나인 가리마을, 지금의 경주 외동읍과 울산 북구 일대로 들어와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철광 찾기였을 것이다. 우리말로 쇠곳鐵場. 울산 북구 달내達川洞에서 이 땅 최고의 쇠곳을 찾아내고 곧바로 쇠둑부리鎔鑛爐 세우는 일에 착수했을 것이다. 외동읍 모하리 속칭 아랫장터에 쇠북두리가 있다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나와있다. 지도를 펼쳐보니 그 동쪽에 삼태봉이 있는데 이는 토함산 줄기이다. 그렇다면 탈하이가 올라간 토함산이 바로 삼태봉이란 해석이 된다.

 

탈하이가 거기에 뭐하러 올라갔을까? 서라벌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살펴 본 것이리라. 툭 트인 장소에서 서라벌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산에 올라 삼태봉의 가장 높은 북쪽 봉우리(650m)에 올라갔은데도 서라벌은 보이지 않았다. 하산로를 입실 쪽으로 잡고 지도에 나와 있는 오솔길을 따라 5분쯤 갔더니 갑자기 숲이 사라지며 외동의 들판이 바둑판처럼 나타났다. 마침내 '탈하이의 토함산'에 도착한 것이다.

 

대구 와룡산 - 서라벌의 명운을 걸고 전쟁을 벌였던 '개구리소년'의 산

 

"전全 진한 임금은 하나도 빠짐없이 와서 이 위대한 왕에게 무릎을 꿇어라" (53 쪽)

 

서기 63년, 백제의 다루왕이 회맹을 소집했다. 이는 진한의 맹주 서라벌을 겨냥한 처사였다. 당시의 서라벌은 백제와는 비교가 안되는 작은 나라였다. 서라벌은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화백회의는 전쟁을 결의했다. 진한의 작은 나라들 또한 큰 나라 백제 편을 들지 아니면 서라벌 쪽에 붙을지 결정해야만 했다.

 

이듬해 백제는 군대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했다. 이로부터 12년 동안 여섯 번의 싸움이 벌어졌다. 역사 속의 와산성은 어디일까? 전쟁터는 아무래도 달구벌일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진한은 길이 난 고개가 거의 없어서 보급은 물길을 이용했다. '개구리소년'사건으로 유명한 와룡산은 최고 높이 299m, 말발굽 테두리 거의 전부가 200m 이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금호강 쪽에 토성만 쌓으면 강이 바로 해자가 되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다.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던 백제는 결국 와산성 공략에 성공한 뒤 200명의 수비군을 이곳에 주둔시켰다. 이 때 아르치閼智가 무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아르치 병사들은 과감하고 신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잔인했다. 포로가 된 백제군 200명을 모조리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금金은 알타이어로 '알트', 복수로는 '알타이'이다. 이 알트가 아르치로 변한듯하다. 즉 아르치는 '금 제련, 세공 기술자'인 셈이다. 나중에 김씨가 되는 아르치 집단은 북방계라는 것이 정설이다.

 

비음산 - '임나가라 종발성'

 

"신라 성에 이르니 왜병이 가득했는데 고구려군이 도달하자 도망하기 시작했고

임나가라 종발성從拔城에서 마침내 항복" (115~116 쪽)

 

임나가라에 망조가 든 것은 서기 400년, 광개토태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서라벌을 구원하면서부터였다. 고구려가 신라의 지원 요청을 받고 남정에 나섰던 이유는 야마토가 백제와 화해하면서 서라벌을 침략, 그들의 세력권에 두려고 하는 것을 방기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창원 용동과 김해 진례면 사이에 있는 진례산성이 일명 염산고성簾山古城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종발의 '발'을 '발 렴簾'자에서 차음했다면 이보다 더 적당한 입지도 없을 것이다.

 




진례산성

 
창원시 토월동에서 비음산 북릉 안부로 올라서니 허물어진 석축 성벽이 보이고 '진례산성 남문'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비음산 정상을 돌아 진례산성 동문을 지나서 용추계곡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마침내 드러난 성의 규모가 어림잡아 둘레 5km가 되는 큰 성이다. 계곡이 서쪽으로 꺾이면서 경사가 완만한 폭포를 이루는 암반 지형이다. 별다른 축성 기술이 없었을 400년대에도 방어 장치로 충분한 골짜기, 진례산성은 종발성이 맞는 것 같다.

 

 

산은 일반적으로 오르기는 지루하고 내려가기는 팍팍하다. 그래서 꽤 많은 이들이 야생화 사진 찍기, 약초 캐기, 나물 뜯기 등으로 소일하면서 지치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산행을 즐긴다. 그러나, 이렇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앞사람 발뒤꿈치만 바라보면서 무작정 걷는다. 이럴 때 <삼국사기>와 함께 산을 찾는다면 그 느낌이 다르고 산길에서 차이는 돌멩이 하나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다. 도 닦는 길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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