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 한 스케치 여행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말이 새끼를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한양으로 보낸다"고 했던가. 까까머리 고등학생인 나는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다. 사촌 누나의 끈질긴 설득이 한판 승을 했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 공부하며 신세를 졌던 사촌 누나는 서울로 시집갔다. 츨세를 하려면 서울에서 공부해야 한다며 사촌 누나는 우리 집을 여러 차례 들락거렸다. 사실은 택시 운송업을 하던 자형의 사업자금이 부족해서 어머니에게 돈 부탁차 사촌 누나는 시골집에 자주 들렀던 것이다.

 

한강이 내려보이는 보광동에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말이 누나이지 나하곤 나이 차이가 많아 말걸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이들과 어울린다. 비록 나에겐 조카 뻘이지만 나이가 비슷한 조카들은 형처럼 나를 잘 따랐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택시를 타고 멀리 놀러 다니곤 했다. 북한산성, 서오릉, 남한산성, 뚝섬유원지 등 난 별천지를 구경했다. 이후 대학생 때는 노선 버스를 타고 종점과 종점을 다니면서 길을 익혔다. 당시 나의 눈에 비친 서울은 정말 넓고 깊었다.

 







 

나는,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아왔다.

그래,

내가 살아 온 곳들을 담아보자.

 

서울 속에 바람,

바람 속에 나,

내 속에 서울

서울의 시간,

그 시간을 그리다. (9 쪽)

 

 

통의동 백송

 

소나무는 중국의 진시황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한 고마움을 담아 나무 木 공작 公 목공이라 불렀다. 이를 합쳐 소나무 松이 되었다. 소나무도 여러 종류인데 나무 껍질이 하얀 색을 띄는 것이 백송이다. 중국이 원산지인데, 옮겨심기가 까다롭고 성장이 매우 더딘 나무이다. 우리나라에선 수령이 100살만 넘어도 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며 보호한다.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백송은 우리나라 것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다. 1990년 여름, 거센 태풍이 몰아쳐 수령 300살로 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통의동은 청와대가 가깝다. 그래서, 다각도로 나무의 회생 수술과 치료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살아날 기미가 보이는 나무는 결국 1993년 사망했다. 누군가 백송으로 관을 만들려고 제초제를 뿌렸다는 얘기도 들렸다.

 

경복궁

 

경복궁의 궁궐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그는 공자의 '시경'에 나오는 두 글자를 인용했는데, '길이길이 크게 복을 누리라'는 뜻이다. 그의 바램과 달리 조선 왕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건물 모두 잿더미가 되는 수모를 당했다. 273년 간 폐허로 방치되다가 1865년 대원군 이하응이 7,581칸으로 복원했다. 당초 390여 칸이었는데, 왕권을 강화한답시고 무리를 했다.

 

조선총독부가 홍예문 자리에 건설되어 광화문이 사라질 운명에 놓이기도 했지만 다행하게도 경복궁 동쪽으로 이전했다. 공교롭게도 이를 성사시킨 인물은 민예운동의 선구자로 불린 일본인 무네요시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전소되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철조 콘크리트로 복원했다가 2010년 신응수 대목장에 의해 원형으로 복원된 광화문이 탄생했다. 제일 힘든 일은 금강송을 찾는 일이었다.

 







 

신무문(神武) ~ 북쪽을 지키는 문이었다.

영추문(迎秋) ~ 신하들이 출입했다.

광화문(光化) ~ 경복궁을 상징하는 중심이었다.

건춘문(建春) ~ 종친과 외척, 상궁, 나인들이 출입했다.

 

"총독부 건물이 사라진 이유는 오로지 하나, 위치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경복궁을 밀어내고 서 있는 그 위용은 결코 그 건물이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나 역시 공감한다. 하지만 진정 식민지 시기의 극복과 청산, 나아가 역사적 교훈까지 얻고자 했다면, 일부라도 그대로 옮겨 일제 침략의 전시물을 모아 박물관으로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47 쪽)

 






 
 

청계천

 

청계천에 고가도로가 있던 시절, 나는 삼일빌딩에서 근무했다. 퇴근이 늦을 경우 창 밖 아래에 펼쳐지는 고가도로 위의 차량행렬은 붉은 선으로 보이기도 했다. 고가도로 아래엔 개울이 흐르고 있었지만,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개천을 복개하고 그 위에 고가도로를 설치했던 것이다. 한국경제의 개발초기 모습을 대변하는 상직적인 건축물이었다.

 

2003년 7월, 고가도로의 철거와 함께 복개된 도로의 상판을 뜯어내자 여전히 개천물은 흐르고 있었다. 청계천은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이라는 내사산內四山들의 수원지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만나서 한양을 관통하는 하천이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자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개천의 범람과 오염이 문제거리였다.

 

당시 불도저라 불리던 서울시장 김현옥이 고가도로의 아이디어를 내고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7년 기어코 착공되었다. 설계 당시 서울의 자동차는 3만대도 안되었지만 2000년대 초반에 300만대로 급증했기에 고가도로는 늘 수리와 보수공사 중이었다. 안전문제까지 거론되자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3년만에 현재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1420년 만들어진 다리에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가 설치되었다. 수표교의 다리는 마름모 꼴로 물의 저항을 줄이면서 아름다움까지 잘 표현하고 있다. 청계천 복개공사 때 이를 철거하여 1965년 장충단 공원에 옮겨 놓았다. 화강암을 짜맞추어 세종 2년에 세운 다리인데 당시엔 소시장이 있어 '마전교'라 불리었고 세종 23년(1441년) 수표를 만들어 홍수에 대비토록 했다.

 






 

청계천의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엔 개천開川이라고 불렀는데, 태종 대에 개천의 양안을 정비했고, 세종 대에 수표를 설치했으며, 영조 대엔 준설공사를 실시했다. 일제강점기엔 도시의 교통과 위생문제를 명목으로 복개가 시작되어 해방 전까지 태평로에서 광교까지 완료되었다. 이후 1958년부터 복개를 다시 시작하여 1977년 현재의 마장동까지 전체를 완료했다. 1916년 '조선하천령'이 제정되면서 상류의 청풍계천淸風溪川을 줄여서 청계천으로 불렀다고 한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은 청계천 위로 지나는 서울성곽 밑에 있던 문이다. 1907년 토사의 흐름을 원할히 한다는 이유로 성벽이 없어지고 대신 다리가 놓였다. 이것이 오간수교이다. 오간수문 근처엔 모래산이 있었다.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퍼 올린 흙 때문에 가짜 산이 만들어졌고, 이를 가산假山이라고 불렀다. 이곳엔 전과자들이 모여서 땅굴을 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가산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었다. 향기로운 꽃이 피는 산, 방산芳山이란 이름이 생겼다. 서울의 방산시장은 이곳에서 탄생된 시장이다.

 

숭례문

 

화재로 숭례문이 타는 모습을 TV로 생중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의 국보 1호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 버려지듯 홀로 남겨져 있어서 그동안 문화재 보호가 소홀하다는 지탄을 받아 왔었다. 광화문이 경복궁의 얼굴이라면 숭례문은 수도 한양의 얼굴인 셈이다. 철없는 아저씨의 어처구니 없는 그런 소행은 이젠 발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숭례문 현판은 세로로 쓰게 했는데, 이는 음양오행에 있어서 '예禮'자가 불 '화火'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을 더욱 높인다는 차원이다. 즉, '이화제화以火制火'인 바, 불로서 불을 제압한다는 정신이다. 천하명필인 추사 김정희도 서울에 들릴 때면 숭례문 앞에서 해지는 줄 모르고 이 편액을 감상했다고 한다. 이는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다행스럽게 지난 화재시에 약간 부서지긴 했지만 무사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간신은 김안로이다. 그는 귀양과 출세를 밥 먹듯 번갈아 하면서 연산군 때부터 중종 때까지 줄 곧 정치에 관여했다. 그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그가 죽자 성난 민중들이 몰려와 고래등 같은 집을 부수고 그 터를 파서 커다란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못이 남지南池이다. 이 남지는 조선조 내내 정치권력의 힘겨루기 때문에 생겼다 메워졌다를 반복했다.

 



 

 

우리 대부분은 숭례문만 보고 떠난다. 건너 편에서 성곽까지 머릿속에 그려봐야 제대로 당시를 느낄 수 있다.길을 건너면 큰 연못이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숭례문 앞에 큰 연못이 있었다고 상상해보라. 정말 멋진 그림이 그려진다. 선조 때의 대표 문인인 이항복은 남지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푸른 연줄기의 향그러운 바람, 당에 가득 불어오는데

층층한 성벽엔 나무 그림자 어울렸네.

노랫소리 나는 저 위 여인의 모습 옥같은 것이

물 건너 서 있는 남자 밤 깊은 줄도 모르누나 (29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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