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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사 안광복의 키워드 인문학
안광복 지음 / 한겨레에듀 / 2011년 3월
평점 :
서울 중동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재직하면서 철학과 논술을 학생들에게 지도했던 저자는 2009년 9월 6일 한겨레신문에 처음으로 칼럼을 연재했다. <철학교사 안광복의 인문학 올드 & 뉴>
이 글들이 모여 출간된 도서가 바로 이 책이다.
매주 2권의 책을 읽고 원고작업을 한 저자의 노력이 가상하다. 저자의 말대로 월급쟁이가 시간내어 칼럼을 연재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는 분명 이 연재를 즐겼음에 틀림없다.
서평을 쓰는데도 시간을 제법 죽여야 함을 나는 잘 안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글을 쓴다는 것이 중독되지 않고서야 어찌 할 수 있는 일이랴. 소설가 김훈씨도 마감 시한에 쫓겨 막걸리를 마시며 원고작업을 했다는 일화를 어느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인문학에서 글쓰기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일' 이다. 숱한 대가들의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바로 이들의 어깨에 올라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이것이 인문학자의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해당 키워드에 적합한 도서 2권을 묶어서 50 개의 꼭지별로 글을 실었기에, 사실은 도서 100 권을 요약해서 읽는 셈이 된다. 그러나, 결코 '수박 겉핥기 식' 이 아니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치 쪽집개 과외 선생님처럼 저자는 핵심을 콕 찔러 깊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를 살펴보면, 토지 공개념, 넛지, 행정복합도시, 1만 시간의 법칙, 왕따, 쇼핑 중독, 호모 루덴스 등 50개의 키워드 중 익히 알고 있는 용어 외에 아힘사, 우분투 등 내게 생소했던 것도 있었다. 이들 키워드를 '생활속의 ism', '선전 선동 그리고 진실', '의식주', '과학 종교 교육', '왕따 갈등 그리고 전쟁', '자본주의 생존학', '기타 생각거리들' 의 일곱 카테고리로 구분하여 이슈별로 쉽게 펼쳐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토지 공개념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났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채 탈출했기에 곧 그들은 굶주림에 노출되고 만다. 그러자 신이 하늘에서 먹을거리인 만나를 내려준다.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이 이야기를 경제학자 헨리 조지는 만나가 떨어진 사막이 만약에 개인 땅이었다면 어땠을까? 란 질문을 던진다. 만나는 땅 주인의 것이 될 것이고, 주인은 이를 팔아서 돈을 벌지만 이것도 계속되란 법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가난해지면서 만나를 사지 못하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가 찾아낸 답은 간단하다. 땅 주인이 이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프랜차이저 식당이 장사가 잘돼도 건물 주인이 집세를 올리면 식당 주인은 '죽 쑤어 개 주는 꼴'이 되고 만다. 땅없는 사람은 결국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에 등장하는 흑인 소년 프라이데이와 비슷하다 하겠다. 비록 무인도지만 이미 로빈슨 크루소가 섬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탐욕은 불안에서 온다고 말한다. 넉넉하면 내 손에 쥐려는 조급함이 사라지는 반면 내 것부터 챙기려는 분위기에서는 쓰고도 남을 만큼 물자가 쌓여 있어도 늘 부족하다. 그래서 헨리 조지는 땅에서 얻는 모든 이익을 세금으로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발이익환수제', '토지공개념' 등, 우리나라 세금 제도에도 이미 그의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100년 전의 책인 <진보와 빈곤>은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넛지(Nudge)
요즈음은 지하철, 터미날, 건물 등의 화장실이 과거에 비해 매우 청결하다. 이탈리아 여행지에서 만났던 코인 화장실이 한때 우리나라 도시에도 도입된다는 얘기가 나온 적도 있었다. 남성용 변기 앞에 서면 '한발 더 앞으로' 란 문구가 붙어 있다. 그런데, 네델란드 암스텔담 공항에서는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소변기 한가운데에 파리 스티커를 붙여 놓았던 것이다. 소변은 파리를 향한 정조준 사격이 되고 덩달아 주변은 깨끗해졌던 것이다.
넛지란 이처럼 사람들을 자연스레 유도하는 선택의 힘을 의미한다. 이미 이를 활용하는 마케팅 기법이 성행하고 있다. 사람은 손실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주식투자에서도 이는 잘 나타난다. 매입한 주식의 가격이 떨어지면 일부러 당해 주가를 외면하려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전기를 절약하면 350달러를 아낄 수 있습니다'와 '전기를 낭비하면 350달러를 잃습니다'라는 두 문장 중 무엇이 분명하게 다가오는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넛지가 요긴한 기술인 듯하다. 우리가 결정해야 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크고 중요한 문제일수록 결정 내리기가 어렵다. 최근에 불거진 영남권 신공항 사업지 선정만 해도 그랬다. 실제로 미국의 건강보험에서는 넛지 기술이 많이 사용된다. 가장 모범적인 사항을 기본 옵션으로 하고, 반대할 경우에만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는 '옵트아웃' 방법을 활용한다.
하지만 넛지를 화려한 말장난 정도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현명한 자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해서는 안된다고 잘라 말한다. 우리들의 생각은 선택과 결단을 통해서 커지는 법이다. 만약 누군가가 대신해서 결정을 내린다면 시민들의 판단력은 점점 약화될 것이다. 조석으로 가벼운 걷기를 반복하면 종아리에 근육이 생긴다. 건강을 약으로 해결한다면서 걷기를 멈추면 생겼던 근육이 오그라들 것이다.
넛지는 가랑비가 옷을 적시듯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길들인다. 화려한 궤변을 펼치던 소피스트들은 시민을 위해서 설득 기술을 펼쳤을까?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궤변론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것이다. 이익을 낳는 기술은 멈추지를 않는다.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는 설득과 대화의 기술들로 넘쳐 난다. 소피스트가 활개를 칠 때 소크라테스는 죽임을 당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경영학은 잡식성이다. 필요하면 경제학, 심리학, 철학, 역사학 등 다양한 지식을 닥치는대로 먹는다. 시대의 흐름을 날카롭게 읽고 유용한 가르침은 모두 진공 청소기처럼 빨아 들인다. 인문학도 이리해야 한다고 저자는 갈파한다. 후손들이 우리 시대의 사상가로 오히려 스티브 잡스나 피터 드러커 같은 경영학의 구루들을 꼽지 않을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문학은 사람과 세상을 고민하는 학문이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분야를 끌어들이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경영학이나, 심리학 등, 새로운 분야의 책들을 '인문서'로 소개한 까닭이다.(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