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 이야기 - 투자가를 꿈꾸는 세계 청소년의 롤모델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 (명진출판사) 4
앤 재닛 존슨 지음, 권오열 옮김 / 명진출판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부터 숫자놀이에 재미를 느낀 특별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들은 대개 즐거운 놀이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 그는 돈의 세계에 무척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이 아이가 바로 올해 79세의 나이로 "투자의 귀재" 혹은 "오마하의 현인" 으로 불리는 워런버핏이다. 지금부터 그의 성장 발자취를 따라 가보자.

 

학교보다 사업이 더 좋아

 

초등학생 시절부터 껌장사, 콜라장사, 신문배달 등으로 사업에 일찍 눈을 뜬 그는 책도 아버지 책이 더 재미있었다. 8살 때에 아버지 서가에 꽂힌 책은 주식이라는 마법의 세계였다. 이도 부족해 아예 아버지 회사에 나가 주식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 이 때 그는 그레이엄의 <증권분석>에 푹 빠졌다. 중학시절도 신문배달과 주식투자를 계속했다.

 

그는 11살에 첫 주식투자를 했다. 누나를 설득해서 함께 어느 주식 3주를 매수했다. 그런데, 주가가 하락하자 매일 책임감때문에 부담을 느꼈다. 35달러에 산 주식이 다시 올라 40달러가 되자 얼른 팔았다. 그러나, 이후 이 주식의 시세는 계속 올라 202달러가 되었다. 많이 후회했다. 이 때 그는 교훈을 얻었다.

 

1. 투자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2. 투자한 뒤엔 그 돈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3. 다른 사람에게 투자를 권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고등학교 시절엔 신문 배달외에 중고차 대여업과 중고 핀볼 게임기 대여업 등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고등학교를 졸업생 374명 중 16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교졸업 앨범의 그의 자신 아래엔 이런 글귀가 있다.

"수학을 좋아함, 미래의 주식중개인"

 

공부가 필요해, 물만난 고기처럼

 

아버지의 권유로 그는 와튼 스쿨에 입학했지만 대학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 2학년 때, 그의 아버지가 4선에 실패하고 낙향하자 그도 가정형편을 고려해 와튼스쿨을 포기하고 고향 인근 네브래스카 대학에 편입했다. 이 때에도 그의 돈벌이는 계속된다. 수업을 마친 오후에 신문 배달 관리를 하며 백화점에서 남성복과 액세서리를 팔았다.

 

1950년 여름, 그는 네브래스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버드 경영대학원 면접을 치루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고배를 들었다. "버핏, 몇 년 뒤에 다시 한 번 우리 학교의 문을 두들려 주는 게 좋을 거 같네요"

"궁즉통"이라고 우연히 컬럼비아 대학교를 소개하는 광고지에서 벤저민 그레이엄 교수를 발견했다. 지원마감시한이 목에 차 지원이 쉽지 않았지만, 그의 뚝심도 대단했다. 지원이 늦었지만 존경하는 그레이엄 교수의 강의를 듣는다면 영광이겠다는 편지와 함께 지원서를 발송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당시 그레이엄 교수는 "가치투자"란 투자철학을 전세계로 전파하고 있었다. 회사가 보유한 자산과 현금 보유에 비해 시가가 낮게 형성된 기업을 주목하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보석찾기를 몇 모금 더 필 수 있는 "담배 꽁초 찾기"에 비유했다.

수업시간엔 그레이엄 교수와 버핏의 토론장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자, 그레이엄 교수는 영특한 제자 버핏을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사교파티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1951년, 버핏은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역사상 가장 높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후 그는 그레이엄 교수의 그레이엄 뉴먼사에 무보수로 일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유대인만 채용하는 원칙때문에 거절당했다. 그는 고향인 오마하로 귀향했다. 아버지의 회사에 주식 중개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젊다는 이유로 고객들은 그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서서히 그의 실력이 진가를 발하자 고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중개인이 되었던 것이다.

 

1954년, 스승 그레이엄으로부터 뉴욕에서 같이 일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레이엄 뉴먼에서 월급 1000달러를 받는 호조건이었다.

버핏은 합류했다. 조금씩 그는 스승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시대와 세대에 맞게 그레이엄의 전략을 수정하고 개량했다. 1950년대는 경제발전이 주식시세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카리스마 강한 경영자가 회사의 수익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여 수치적 자료뿐만 아니라 경영자의 자질을 투자 판단 기준에 포함했다.

 

돈에 대한 철학, 나눔의 실천

 

그는 돈을 버는 이유가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그는 세계 최고의 부자 대열에 올라도 소박한 생활을 했다.

"그에게 부자가 되는 것은 지력, 창의력 그리고 인내력을 시험하는 수단이자 도전 이라는 짜릿함이 존재하는 수수께끼 조각들을 연결하는 게임과 같은 거였다" (175쪽)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이었다.

 

1956년 그의 나이 26살에 오마하로 귀향하여 본격적인 투자 사업을 시작했다. 7명의 조합원으로 금융투자조합을 결성하여 10만 여 달러를 모았다. 버핏은 매년 4%의 수익을 보장받았다. 1962년 조합원은 90명으로 늘었고, 그는 "버크셔 해서웨이"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1960년 대말의 강세장에서 주가가 오를만큼 올랐기에 숨은 보석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는 거품이 끼었다고 판단하고 주식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1969년 5월 29일 그는 투자조합의 문을 닫는다고 선언했다.

 

"저는 이런 시장 환경에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괜히 제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게임에 뛰어들어 이제까지 쌓아놓은 좋은 기록을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211쪽)

 

1970년대 초, 주식시장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그는 워싱턴포스트, 게이코 등을 버크셔 해서웨이 명의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또 다른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85년, 포브스는 55세의 그를 미국 억만장자 목록 제일 위칸에 올렸다.

1990년대 강세장에 불을 지핀 IT산업에 대한 투자를 그는 외면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업에 투자하길 싫어하는 그의 습관탓이었다. 한편,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은 버핏이 인터넷 주도의 경제 환경을 이해 못하는 한물간 노인이라고 비아냥거렸다.

2000년 초가되자 IT버블론이 고개를 들며 컴퓨터 관련 기업들의 고평가론이 대두되고 주가는 곤두박질, 닷컴 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IT에 치중한 투자자들은 많은 피해를 보았다. 그러자, 버핏에 대하여 "역시 거장"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2006년 6월 25일 버핏은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자신의 재산(당시 가치로 약 310억 달러 규모)을 기부한다고 밝혔다. 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앞 장을 선 것이다. 또한, 그의 뜻은 자식들에게도 이어져 큰 아들은 야생동물보호, 환경개선 사업을 지원하고, 딸은 저소득층 자녀의 조기아동교육을 후원하는 자선단체를 이끌고 있고, 막내 아들은 예술, 교육, 복지사업을 후원하는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들 가족의 돈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폴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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