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박치기다 - 재일 한국인 영화 제작자 이봉우가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책!
이봉우 지음, 임경화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서편제], [쉬리] 등 한국 영화를 일본에 소개하면서 일본 내의 "한류 열풍" 를 점화시킨 주인공이자 영화 제작자인 재일 한국인 이봉우의 인생 역정이 한 권의 책 속에 잘 녹아 있다.

 

재일 한국인은 일본에서 살면서 수많은 차별과 멸시를 당하며 살아 오고 있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 3학년 때 아사히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프랑스어 스피치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면 국비장학생 자격으로 프랑스에 1년간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는 예선을 통과 본선 진출자로 통보받았지만 이후 취소통보를 받는다. 알아보니 애초에 일본 국적자가 아니면 참가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고등학교 축구부 시절엔 일본에서 "기타 학교"로 분류되어 전국체전이나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제주도에서 발발한 4. 3 사건을 피해 일본에 온 그의 부모는 1940년대부터 일본 각지를 전전하다 교토에 정착했다. 1960년, 그는 교토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 양복 프레스 공장을 경영한 아버지는 교토 조선 제 1 초급학교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형은 당시 의술로 치료가 불가능한 근디스트로피증으로 18살에 죽었다.

 

1986년, 도쿠마저팬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영화의 기획과 유통 과정 등 영화 제작에 관한 세세한 내용을 배우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3년의 직장 경험을 토대로 "시네콰논" 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운 좋게도 부동산업으로 큰돈을 번 대학 시절 친구에게 일천만엔을 빌려 창업했다. 방 2개, 마루 1개, 부엌 1개로 구성된 맨션이 주거공간이자 사무실이었다.

 

파리에서 관람했던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영화를 잊지 못해 자신을 배급회사라고 속이고, 팩스를 폴란드로 무작정 송부했다. 운좋게 답장을 받고 바르샤바로 가서 첫 번째 배급계약을 250만엔에 체결했다. 흥행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이를 계기로 18년 동안 제작 포함 180여 편의 영화 작품에 관여했다.

 

"박치기" 란 "이마로 세게 받아 치는 것"이다. 프로 레슬링이 최고의 흥행 스포츠였던 시절 김 일 선수의 트레이드 마크가 바로 박치기였다. 박치기는 주로 일본 간사이 지방의 불량 학생들이 자주 사용했으며, 조선고등학생들의 주특기로도 유명했다.

그가 다닌 교토 조선 제 1 소학교 졸업생 25 명의 남학생 중 이미 7 명은 사망하고, 4 명은 행방불명이다. 그런데, 2003년 봄 그는 "소년 M의 임진강" 이란 제목의 책을 접했다. 내용은 1968년의 교토를 배경으로 "임진강" 이란 노래를 조선고등학교에서 듣게 되는 일본 남학생의 에피소드였다. 여기에 청춘 드라마를 가미한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 영화 [박치기!]를 제작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삼았고, 특히 조선고등학교 학생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자신의 주변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화들이다.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하는 흥행으로 무려 20 주간이나 상영하는 열풍을 일으켰다. 2005년 연말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16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180여 편의 영화를 배굽했지만 [박치기!]만큼 사랑과 격려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이 영화의 한국 개봉이 확정된 일이었다.

 

한편, 그는 1993년 칸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서편제]를 발견하고 일본에 배급하기로 작정했다. 당시 그의 국적은 "조선" 이었다. 그래서, "48시간 이내 유효" 라는 임시여권을 들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입국심사대에 대기 중인 안기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신라호텔에 투숙했다.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자을 만나 계약 건을 상담하려는데, 이 사장은 냉면집으로 자기를 데리고 가서는 소주를 마시면서 서편제 영화의 제작 과정과 그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영화이야기, 재일 한국인 문제 그리고 한일 관계 등에 대하여 밤 늦게까지 의견을 주고 받았다.

 

계약은 물건너 갔다고 생각햇는데, 이 사장의 아들이 공항으로 배웅하면서 노란 봉투를 전해 주었다. 봉투를 열어 보고 깜짝 놀랐다. 단 두 장짜리의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이렇게 짧고, 간결하며, 감동적인 계약서는 처음이었다. 영화 제목, 계약 기간, 지불 시기, 금액, 권리의 범위만 적혀 있는 간단한 계약서였다. 그의 선입견 속에 살고 있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영화는 [바람의 언덕을 넘어]란 제목으로 1994년 6월 개봉되어 12 주 동안 상영되어 관람객 10만 명을 돌파하면서 성공을 거두자 일본인의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다. 이후 영화 [쉬리]의 일본 판권을 구입한 그는 2000년 1월 15일 부터 도큐 체인에서 상영을 시작하면서 100만 명이 넘는 관객의 입장으로 20억 엔의 흥행 수입을 올리는 대박을 터트렸다. 한류의 첫 페이지를 이렇게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전에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원망했다. '자이니치(재일 한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몰이해와 무관심에 화가 난 적도 많다. 그러나, 아무리 한국 정부가 우리를 함부로 대할지라도 많은 재일 한국인은 한국이라는 조국에 항상 일방적으로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일본에 한국 영화를 다수 소개하면서 이 중 몇 작품을 성공한 덕분에 업계에서는 그를 "한류 붐의 불을 지핀 인물" 로 평가햇고, 이로 인해 5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한국영화공로상" 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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