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21세기와 소통하다
안희진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들이 그리 자주 우리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마저도 이내 다음의 순간들에 묻혀 버리고 또한 오랫 동안 우리를 멀리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면서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우리의 하찮은 대상들 너머에서 물결처럼 굽이쳐 다가오는 삶의 깨달음은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지도 못하고 멀리 사라진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모든 것이 나에게 다가 올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에, 비바람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지는 순간에, 우리가 사랑이나 진리나 행복이라고 이름 붙이는 모든 것들의 정체가 베일을 걷고 그곳에 있다. 손을 뻗기만 하면 된다.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손을 뻗쳐 보면 그 순간에 그것은 사라지고 만다. 아쉬워한들 이미 진 꽃이 다시 피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중국 고대의 대사상가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장자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고, 그가 썼다는 [내편] 일곱 편을 제외하고는 실제 몇 사람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내용도 장자 자신이 말하듯 寓言이 곳곳에 깔려있어 얼핏 보면 황당무계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찬찬히 다시 읽어 보면 오묘한 이치와 사상이 있음을 알게 되고 특히 풍자는 읽을수록 흥미진진하다.

 

한국의 전래 동화 중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은혜 갚은 꿩"이란 이야기가 있다. 꿩을 잡아먹으려는 구렁이를 한 선비가 활을 쏘아 죽이고, 나중에 다른 구렁이가 그 선비를 잡아먹으려하자 꿩이 죽음으로 선비를 구한다는 줄거리이다. 구렁이는 꿩을 잡아 먹어야 살 수 있다. 꿩도 나무나 숲에서 벌레를 잡아먹고 산다. 과연 꿩을 먹는 구렁이는 나쁘고, 벌레를 먹는 꿩은 좋은가?

 

여기서 善과 惡을 놓고서 토론을 벌여 보자. 아이들은 선비가 왜 불쌍한 구렁이를 죽였어야 했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의 의도는 아이들에게 은혜를 갚는 일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 선악과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은 순전히 맘 속 관념의 작용일 뿐이다. 장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니 정의니 하는 작은 가치들, 예법이니 지식이니 또는 믿음이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기준에 의지하고 있는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런데, 장자라는 인물은 언제 적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史記]를 비롯한 몇몇 책에는 장자에 관하여 "그 배움은 노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공자의 무리를 꾸짖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유교적인 수양을 쌓았으나 노자풍의 정서를 지녔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장자]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제나라 宣王과 장자와의 대화가 많이 나오는데, 이를 토대로 연대를 따져보면 대체로 장자는 맹자와 거의 비슷한 시대의 사람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장자가 태어난 곳은 오늘날의 하남성 귀덕현으로 노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은 일상적인 現實生活을 벗어나지 않는 착실한 가르침인 반면에, 노자와 장자는 자유분방하고 理想的이며 때론 허무적인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공자와 맹자의 고향은 산동성 연주시이고, 노자와 장자의 고향은 하남성 귀덕현인데, 이 두 곳의 중심지를 직선으로 연결하면 800 킬로미터가 채 안되어 광활한 중국 대륙에 비추어 보면 그리 먼 곳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책은 2 부 5 장에 걸쳐 16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란 장자의 지적과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장자의 해법이 소개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 때문에 공부 또는 일을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라는 단순 설명은 참으로 공허하다. "나" 라는 것도 실상이 아닌 잠시 사용하는 겉옷인바, 장자로부터 겉옷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해법을 배우고 또한 맑은 영혼의 눈을 떠 현상을 꿰뚫고 실상을 본다면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된다.

 

참된 삶을 구현하려면 먼저 자신의 참모습을 되살려야 한다. 자신의 참모습을 되살리면 나와 사물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나" 라는 것을 버리고 "참된 나" 의 상태가 되면 "나" 와 "내가 아닌 것" 의 분별이 없어진다. 이처럼 분별심이 없는 상태를 장자는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시장 거리에서 남의 발을 밟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지만, 형이 동생의 발을 밟으면 부드러운 눈길만 줘도 되고, 무모가 밟았을 때는 아무 말도 필요 없다." (242 쪽)

 

"남과 친하게 사귀면서 선물 따위를 하지 않는 것은 남과 자기의 구별을 잊었기 때문이다. 나와 남을 하나로 보는 사람을 하늘 사람이라고 한다." (242쪽)

 

"발이 신을 잊는 것은 신이 발에 꼭 맞기 때문이며, 허리가 허리띠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허리에 꼭 맞기 때문이다." (242쪽)

 

깨달음은 아침에 떠오르는 햇빛과 같다. 우리는 요리사 포정의 소 잡는 과정, 꼽추의 매미집기, 기성자의 싸움 닭 훈련에서 공통점을 발견한다. 도를 깨달은 것은 일정한 과정을 통해서라는 사실이다. 과정이란 의도적인 기술 쌓기를 초월한 나라는 것을 잊는 과정이다. 요리사 포정에겐 소가 소로 보이지 않았던 3년 동안의 기술 쌓기는 무위의 경지였다. 이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잊고 진정한 나를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 송대의 시인 소동파가 "[장자]의 문장은 넓기가 바다와 같고, 변화무쌍하기가 용과 같아서 천하의 기묘한 글이다" 라고 극찬했던 것처럼, 장자와의 소통을 통해 그의 이름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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