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 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 춘추
이종욱 지음 / 효형출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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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이면서 현재 서강대학교 총장직을 맡고 있는 저자 이종욱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한민족의 시조는 누구인가?" 답이 단군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런 문제점을 제기한다. "왜 단군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한국인은 없는가?"

 

저자는 한국의 역사교육이 소위 官學派의 이론과 주장을 그대로 따르면서, 신라의 삼한 통일의 위업이 왜곡되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즉, 애초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같은 민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외세를 이용해 동족을 살상한 몰염치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유엔 인종차별위원회에서도 한국은 다민족적 성격을 인정해야 하며 실제가 아닌 '단일민족 국가이미지'를 벗겨내야 함을 지적했다. 아울러, 단일 민족임을 내세워 소수 민족을 무시하는 인종적 우월성의 관념이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 있음에 유의한다고 했다. 순수 혈통의 단일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이젠 대부분 인식하는 듯하다.

 

신라는 시조 혁거세로부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역사를 上代(시조 - 28대 진덕여왕 : 기원전 57년 - 654년), 中代(29대 무열왕 - 36대 혜공왕 : 654 - 780년), 그리고 下代(37대 선덕왕 - 56대 경순왕 : 780 - 935년)로 고찰하고 있다. 상대엔 고대국가에서 骨品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며, 중대는 삼국을 통일하고 왕권을 강화한 문화의 황금기였다. 하대는 골품제도의 붕괴, 왕권의 쇠퇴로 호족세력들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골품제도와 花郞제도는 신라가 통일 위업을 달성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골품제도란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직, 혼인, 의복, 가옥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차별내지 규제를 한 신분제도이다. 왕족을 대상으로 성골과 진골로 분류한 骨制와 여타 사람들을 대상으로 1두품에서 6두품까지의 등급인 頭品制가 있었다. 화랑을 중심으로 청소년을 모아 군사훈련을 하고 道와 義를 연마하면서 인재를 양성하던 제도가 화랑제도이다. 잘 생긴 남자를 선출해 그를 화랑으로 정하고 그를 따르는 낭도로 구성되었는데, 黃券이라는 명부에 이들 모두의 이름이 등재되어 나라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이제 이책의 주인공인 김춘추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661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자면, 그의 태어난 해를 603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용수이고, 어머니는 천명공주이다. 용수는 진지왕의 아들이며, 천명공주는 진평왕의 딸이다. 따라서, 그는 왕족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골제에 의한 성골인지 진골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520년 법흥왕이 율법 반포하면서 새로이 만든 신분이 성골이다. 이전 부터 존재했던 진골보다 상위의 신분인 셈이다. 성골은 왕과 그의 형제, 그들의 자녀로 이루어진 혈족집단이며,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새로운 성골집단이 생기게 되었다. 이전의 왕, 왕의 형제와 그들 자녀는 자연히 진골로 하강하는 특이한 신분제도였다. 그런데, 춘추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강제 폐위를 당했기에 그의 신분도 진골로 추락했던 것이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우린 "삼세판"을 외친다. 믿거나 말거나 누구에게나 운명적인 기회가 3번 찾아온다고 한다. 김춘추도 왕이 될 기회가 3번 있었던 셈이다.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당하지 않았다면 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연스레 왕으로 등극했을 것이다. 이후 아버지 용수가 진평왕의 사위가 되면서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 왔지만, 진평왕이 딸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 줌으로 인해 10년간의 궁생활을 끝내고 출궁당해야만 했다. 출궁된 뒤 그는 15대 풍월주 김유신과 칠성우를 만나는 행운과 함께, 비로소 654년 왕위에 오른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했다. 그는 10년간의 궁생활을 통해 성골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생활 양식을 미리 익혔으며, 스스로 이런 과정을 겪어면서 왕의 자질을 갖추어 간 인물이었다.

647년, 상대등 비담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칠성우를 중심으로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제압한다. 진덕여왕대에 그는 새로운 정치조직인 집사부를 설치하고 율령으로 신하의 의관을 중국식으로 변경하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등 중국 문화를 급속히 받아 들였다. 이는 물론 그의 치밀한 외교술하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642년 8월,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가 백제에 패할 때 당시 城主 품석 부부는 모두 죽었다. 품석의 아내는 춘추의 딸이었다. 이때 그는 반드시 백제를 패망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신라 혼자의 힘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하기엔 역부족임을 실감했기에 그는 화려한 외교 전술을 펼친다. 642년 고구려 연개소문과 보장왕을 만난 일과 648년 당 태종을 만나 원병을 요구했던 그의 빛나는 외교는 사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더구나, 그는 아들 문왕을 당 태종 곁에 宿衛토록 하면서 당태종의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642년 백제 의자왕이 신라의 성 40여개를 빼앗고, 655년엔 고구려, 백제, 말갈의 연합군이 신라 북쪽의 33개성을 빼앗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의 연속이었다. 진덕여왕이 8년이란 짧은 재위를 마감하고 죽자 그는 출궁당한지 43년인 654년 왕위에 올랐다. 이는 김유신과 칠성우 세력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M&A 프로젝트가 마침내 서막을 올렸다. 660년 7월 당나라는 소정방을 사령관으로 삼아 13만명의 육군과 해군을 투입했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백제를 함락시키고, 668년엔 고구려까지 정벌했다. 이후 671년에 당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시킴으로써, 한반도의 통일 과업을 완수했다.

 

삼국 중 세력이 제일 미약했던 신라가 통일 대업을 이루는 데엔 중요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김춘추를 중심으로 김유신,칠성우 등 유능한 집단이 있었고 둘째, 골품제도에 의한 효과적인 인적자원 관리로 국력이 조직화되었고, 셋째 호국정신이 투철한 화랑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부터는 김춘추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펴 보자.

 

"세상을 구제한 왕이고, 영걸한 군주이며, 천하를 하나로 바로잡으니 덕이 사방을 덮었다. 나아가면 태양과 같고 바라보면 구름과 같다." - 화랑세기

 

"당나라 군대의 위엄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얻어 군현을 삼았으니, 융성한 시대라 이를 만하다." - 삼국사기

 

"춘추가 비동족인 당의 대세력을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 역사학자 손진태의 [한국민족사개론]

 

"신라로 하여금 외민족의 병력을 빌어서 동족의 국가를 망하게 한 반족적 행위를 하게 한 것은 귀족국가가 가진 본질적 죄악이요, 그로 말미암아 민족의 무대는 쪼부라 들었다." - 손진태의 [국사대요]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완전한 것이다. 과거 삼국의 활동무대에 속하던 만주의 넓은 지역이 그 영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 역사학자 이기백의 [국사신론]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이용했다는 점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 고등학교 [국사]

 

官學派가 만든 민족사의 틀 속에서 춘추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반민족적 행위자의 표상으로 삼았음을 저자는 강하게 비판한다. 춘추가 기획한 삼한통합은 고려, 조선은 물론이고 현재 한국, 한국인, 한국 사회, 한국 문화의 기원이 신라에 있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현재 한국인이 신라인의 후손이 아니라고 아무리 강변해도 실제 역사는 한국인이 신라인의 후손임을 말해주고 있다면서 이 책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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