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경기도 양주엔 임꺽정 우물이라는 옹달샘, 임꺽정봉이 있다. 향토사학자는 출생시 거꾸로 태어 났기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임꺽정이라고 설명한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감악산에 오르면 장군봉이 있고, 이곳엔 임꺽정굴이 있다. 관군에 쫓기던 임꺽정이 이곳에 피신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명종실록엔 임거질정은 16 세기 중반, 조선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고간 화적떼의 괴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꺽정은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유명 도적 중 한명이다. 그는 경기도 양주사람이지만 황해도 봉산 갈대밭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고리백정이었다. 조선시대는 士,農,工,商이라는 신분의 차별이 분명한 선비 중심의 사회였기에 백정은 농,공,상 축에도 못끼는 천한 신분이었다.

 

벽초 홍명희는 일제 치하인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조선일보에 조선 시대 최대의 화적떼 임꺽정 부대의 활동상을 그린 장편 역사소설 [임꺽정전]을 연재했다. 이 소설은 5편 10부작으로 구성되어,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에선 당시의 혼란한 시대 상황을 그리면서 임꺽정의 일생을 중심으로 칠두령의 이력들을 소개하고 있다. 의형제편에선 청석골에서 조직을 결성하기까지의 과정을, 화적편에선 이 집단의 활동상을 그려 내고 있다. "우리말 사전" 이라고 평가할 만큼 뛰어난 토속어 구사와 함께 야담과 전래 설화 그리고 민간 풍속 등을 풍부하게 싣고 있다.

 

이 책의 저자 고미숙은 임꺽정을 포함한 칠두령이 요샛말로 한결같이 백수이며 비정규직이었음을 빗대어 이들의 활동상을 "마이너리그의 향연" 이라고 명명하여 벽초 홍명희의 원작을 유쾌하면서도 맛깔스럽게 재해석하고 있다.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과 조직 등 7 개의 관점에서 이들의 향연을 재치있게 분석하고 있다. 한마디로 10권의 도서를 단행본으로 묶어 놓은 셈인데, 칠두령의 사랑과 우정, 자유와 열정, 그리고 반역과 투쟁의 여정들이 펼쳐져 있다.

 

칠두령은 명사수인 이봉학, 표창의 명수인 박유복, 축지법을 구사하는 천왕동이, 돌팔매의 고수인 배돌석, 천하장사인 길막봉이와 곽오주, 그리고 모사꾼 서림이다. 이들은 본거지 청석골에서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또 논다. 이것은 이들의 일상이다.

우리는 임꺽정을 서양의 로빈후드와 비교하며 義賊으로 평하고 있다. 로빈후드는 중세 시대의 봉건 지배층으로부터 재물을 탈취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돌려준 도적이다. 그러나, 正史인 명종실록엔 의적이란 표현은 없다.

 

1559년 4월 황해도에 도적떼가 출몰, 관아를 습격하자 관리를 모두 무관으로 교체해도 이들은 정면으로 맞섰고 이후 한양에서 급파한 중앙군 등 관군 500명이 투입되자 산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까지 감행, 그 규모가 60명의 기병까지 포함된 도적떼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한편, 조정에서 파격적인 포상금을 내걸자 가짜 임꺽정 소동이 발생하는 촌극도 벌어진다.

 

갈대밭이 무성한 황해도 봉산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던 임꺽정이 왜 도적이 되었을까?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자. 국가의 토지 정책이 바뀌고 새로운 농법이 개발되자 15 세기부터 간척지 사업이 매우 성행했다. 간척지 개발이 성공하면 사유지로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갈대밭이 무성한 해변은 윤원형 등 권문세가들이 활발히 간척사업을 하면서 사유지로 변했다. 생계의 터전을 잃게된 임꺽정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훔친 물건을 거래하기 위해 임꺽정 일행은 한양 청계천 장통교 부근에도 출몰한다. 당시 이곳은 장통방으로 불리며 육의전이 늘어선 시장통이었다. 한양에 거주하면서 유통 상황을 파악한 정보참모가 바로 서림이었다. 간척지에서 생산한 쌀을 한양으로 가져오는 뱃길이 열리면서 권세가들은 결탁한 상인들을 이용해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취한다. 女主 문정왕후의 지시로 내수사는 백성들의 땅을 강탈한다. 내수사 소유토지는 세금이 없었기에 세수로 감소했다. 땅을 뺏긴 백성들은 심지어 내수사의 노비를 자처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재정 부족으로 녹봉을 지급못하자 관리들도 부정축재에 눈을 돌렸다. 이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수많은 도적떼가 전국에서 출몰했던 것이다. 임꺽정도 그 중 하나였다. 양반의 토지 확대로 삶의 터전을 잃게된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도적이 된 것이었다.

 

임꺽정은 백성을 약탈하고 관아를 기습한 전형적인 도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백성과 아전들이 토벌대에 대한 정보를 내통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좋은 도적이 아니었나 싶다. 한탄강 인근에 고석정과 고석산성이란 명소가 있다. 길이 876 미터, 높이 3 미터의 고석산성은 관군에 맞서기 위해 임꺽정이 쌓은 성이라고 향토지에 기록되어 있다. 함경도에서 조정으로 공물을 바치는 통로였기에 임꺽정이 공물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설화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1562년 임꺽정은 남치근이 이끄는 토벌군에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마이너리그의 향연은 끝이 난다. 그러나, 농민들은 감히 실행하지 못한 자신들의 바램을 대신해 주었기에 그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지도층의 수탈에 당당히 맞서 저항한 희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부정부패를 방지하는 사회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때 순박한 백성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 그가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처음부터 도적이 되고 싶었던 자가 누가 있겠소.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살기 위해 도적이 되었을 뿐. 백성을 도적으로 만든 자가 과연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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