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 이시카와 다쿠지 지음, 이영미 옮김, NHK '프로페셔널-프로의 방식'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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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NHK의 유명 프로그램 [프로페셔널 - 프로의 방식]에 출연한 기무라 아키노리씨의 무농약 사과 재배 성공 스토리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그는 올해 나이 60세, 일본의 사과 생산지로 유명한 아오모리현의 농부이다. 농약을 전혀 사용치 않은 "기적의 사과" 때문에 그는 일본에서 유명 스타 못지 않는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왜냐하면, 무농약으로 사과를 재배한다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먹고 있는 사과는 개량종이다. 본디 사과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 산맥의 산기슰 일대에서 자라는 야생종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그 크기가 작아 크랩애플(꽃사과) 로 불리며 신맛과 떫은 맛이 강해 요리나 술재료로 사용되어 왔단다. 멘델의 유전 법칙이 알려진 후 품종 개량이 가속화되었고, 북아메리카 신대륙에서 개량된 종은 구대륙의 것보다 훨씬 크고 단맛이 강한 과일이다.

 

"不狂不及"이란 말이 있다. 미치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는 뚯인데, 기무라의 삶이 바로 무농약 사과 재배에 미쳐 있었다. 22 세에 결혼한 그는 아내 미치코가 농약을 살포하면 며칠씩 앓아 눕는 과민성 체질이어서 농약 살포를 줄일 방법을 찾고자 마을 서점을 돌다가 책표지에 "아무 것도 안하는, 농약도 비료도 전혀 안 쓰는 농업" 이라고 적힌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저서 "자연농법"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이 책이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농작물이 자연의 산물이라기 보다 일종의 석유화학 제품이 되었다. 지금껏 사과 재배를 위해 봄부터 수확 전까지 10여 차례의 농약을 살포해 왔다. 책의 내용엔 귤 재배에 관한 상세한 기술뿐이었지만, 그는 후쿠오카의 자연농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독학을 시작했다. 사과에 대한 책은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그는 독학을 토대로 과수원의 농약 살포 횟수를 변경했다. 전엔 13회 정도 뿌렸지만, 과수원 4곳 중 처음엔 1곳만 무농약, 다음 해엔 2곳을 무농약, 그 다음 해엔 4곳 모두를 무농약으로 재배해 나갔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사과 수확이 전혀 없었다. 농약을 살포하지 않자 반점낙엽병이 번져 사과 나뭇잎이 누르게 변하면서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대개의 식물들은 잎의 엽록체가 광합성을 함으로써 꽃과 열매가 맺힌다. 따라서, 꽃이 피지 않으니 당연히 사과가 열릴리가 없다.

 

그의 집념은 대단했다. 잠을 자다가도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밭으로 나갈 태세였다. 안해 본 시도가 없었다. 밀가루로 풀을 쑤어 뿌리기도 하고, 술을 묽게 타서 뿌리기도 하고, 고추 냉이를 뿌리기도 하며, 심지어는 달걀 흰자를 뿌리기도 했다. 완전 코메디 시츄에이션이다. 이러는 가운데 사과 나무는 점점 상태가 나빠졌고 과수원은 벌레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5년 째 접어 들었다. 사과밭은 계속 악화되고, 주위에선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친구들도 그만 두라는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자 외면하고, 심지어 본가에서도 담을 쌓고 지냈다. 이때 붙여진 별명이 파산자를 뜻하는 "가마도케시"였고, 사람들은 그의 과수원을 "放置園"이라 불렀다.

 

새벽부터 과수원에 나가 벌레를 잡고, 식초를 나무에 뿌려 주었다. 과수농사가 어렵자 생활고 해결때문에 애지중지하던 트랙터와 트럭도 매각했다. 쌀농사를 하던 논도 빚때문에 남에게 넘긴 상태였다. 그러자, 그는 내면의 또 다른 자아로부터 "이젠, 그만 포기해"란 외침을 자주 듣는다. 생활이 더욱 힘들자 이젠 사과밭에서 기른 채소를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쌀을 산다. 일곱 식구가 먹으니 쌀도 금방 없어진다. 그래서, 죽을 쑤어 먹었다. 한창 자라는 아이를 먹인다고 그의 아내는 거의 입에 대지도 않았다.

 

농사일를 못하는 겨울엔 도쿄로 돈벌러 갔다. 공원에서 노숙하면서 항구의 하역부, 공사장 잡부 등으로 돈을 벌었다. 장인도 산에서 캔 나무 줄기에서 채취한 애벌레를 낚시 가게에 팔아 돈을 벌었다. 그는 마치 조각배에 가족 일곱 명을 태우고 망망대해에 있는 심정이었다. 한 줄기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저녁에 이와키산에 올랐다. 달빛 아래 한그루의 나무가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처음엔 사과 나무로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도토리 나무였다. 농약을 살포하지 않아도 잘 자란 나무를 보고 그는 자연의 순리를 크게 깨달았다. 문제는 나무가 아닌 토양이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과수원에서 일부러 잡초도 제거 않고 곤충과 벌레도 그대로 두었다. 오히려 토양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콩을 심었다.

 

그는 무농약 재배에 대한 신념이 있었지만 생활비 때문에 야간에 돈벌이에 나섰다. 8개월 근무한 파친코에서 해고되자, 그는 번화가 카바레에서 일을 했다. 처음엔 화장실 청소로 시작했지만 이내 신임을 얻어 웨이터가 되었다. 어느날 지역 야쿠자로부터 폭행을 당해 그만 두기까지 3년간 그곳에서 근무했다. 이날의 폭행으로 그는 앞니를 잃었다. 지금도 그는 빠진 채로 지낸다. 옛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란다.

 

폭행 사고후 그는 과수원에 전념했다. 사과밭에 콩을 뿌린지 3년, 농약을 멈춘지 8년이 되는 해에 마침내 사과 나무에 일곱 송이의 사과꽃이 피었다. 이 중 두 개의 사과가 열렸다. 1991년 가을, 태풍이 아오모리현을 휩쓸었다. 과수원 농가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뿌리채 뽑힌 사과 나무가 날라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사과 나무는 80퍼센트 이상이 멀쩡했다. 자연농법의 쾌거였던 것이다.

 

그의 사과 판매는 일반 유통 경로를 이용하지 않는다. 직접 주문을 받아 배송하는 진정한 의미의 산지 직송이다. 엽서나 팩스로 주문을 받아 주문자에게 직접 택배로 보낸다. 너무나 유명해 져서 생산량이 주문량을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 수 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도 그의 주문 팩스는 끊이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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