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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같은 언어 - 같은 밤을 보낸 사람들에게
고은지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평점 :
내 번역이 완벽하지 않음을 잘 안다. 만약 엄마의 편지가 잠을 잘 수 있다면 나의 번약은 그것이 꾸는 꿈일 것이다. 편지는 내가 머무는 곳이 어디든 그곳으로 엄마를 데려와 거듭거듭 엄마의 사랑을 베풀어준다. - '번역에 관하여' 중에서

(사진, 책표지)
작가 고은지는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줄곧 공부하면서 성장한 이민 2세로 특히 15살 때부터 아버지가 한국에서 일하게 됨에 따라 부모님 모두 한국으로 떠난 이후 심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책은 당초 한국에서 딸에게 보내온 엄마의 한글 편지 49통을 영어로 번역한 것과 두 페이지 정도의 옮긴이 말로 구성된 초안이었는데, 이후 최종 출판 과정에서 엄마의 한글 편지는 10통만 실리게 되었고 2쪽의 후기가 200쪽의 에세이가 되었다고 한다. 미국 현지에서 출판된 도서엔 엄마의 한글 편지가 영어로 번역된 것이 실린 반면, 한국에서의 출간 도서엔 엄마의 한글 편지가 그대로 실렸다.
한국에선 윤회설을 근거로 이런 얘기가 있다. 즉 전생에 누군가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했던 원수 같은 사람은 그 사람의 부모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와 자식의 전생前生은 원수 사이라고 흔히 말한다. 작가는 198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출생, 억울한 누군가의 환생으로 복수한 셈이었다.
작가가 네 살 때 의사는 언어장애 소견을 밝히며 글을 읽을 수 있을지를 의심할 정도였다. 4년 반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학교에선 학습 장애를 겪는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에 보내길 원했지만 엄마는 직접 딸을 가르치기로 했었다.
아빠가 한국의 한 전자 회사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취업 제안을 받음에 따라 작가의 삶에 변화가 오게 된다. 서울에서 근무하며 기술 부서를 이끌어야 하므로 작가의 부모는 생활터전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계약기간 3년 동안 자식 곁을 떠나야 하지만 든든한 경제적 지원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생겼던 것이다. 작가의 나이는 15살이었다.

(사진, 엄마의 한글 편지)
엄마는 2005년부터 한국에서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꼴이었다. 전화기 너머로의 짧은 국제통화에 비하면 편지글 속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더 가깝게 들렸다. 읽고서 봉투에 넣었다가 또 꺼내어 읽었다. 어떤 날은 두 번씩이나 읽었다. 놓친 단어를 찾는 심정이었다. 그 편지를 치우고 나면 공황이 다시 찾아왔다. 엄마가 서울로 함께 가자고 했을 때 가지 않은 게 아마도 후회되었을 듯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름, 작가는 비행기를 타고 엄마를 만나러 갔다. 인천공항에 도착, 서울 근교 분당의 부모님이 사는 동네로 갔다. 탄천 인근의 고층아파트였다. 아파트엔 작가의 방도 마련되어 있었다. 잘 꾸며진 방에 와서 함께 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아빠는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미 2년 더 계약을 연장했을 때였다. 엄마가 자주 다니는 32층짜리 고급 백화점에도 동행했다. 흥정 끝에 비싼 코트를 선물로 사주었다. 백화점 직원은 이런 말을 했다.
“부모만큼 자길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단 걸 알아야 해요. 남편도 아이들도 부모만큼 사랑해주진 않아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원 없이 그 사랑을 받아먹어요. 그게 남은 평생을 지탱해줄 거예요.”(54~5쪽)
엄마의 고향은 대전이다. 할머니 '준'은 그 일대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준의 딸인 엄마는 산업화가 한창이고 예방접종과 구불구불 뻗은 고속도로와 텔레비전이 있는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준의 남편 '리'는 풍채 좋은 근육질 몸에 씀씀이가 후한 사람이었다. 여자 문제를 제외하곤 말이다. 준은 리가 밖에서 낳아 데리고 온 딸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친자식처럼 키웠다. 작가의 엄마는 막내딸이었는데, 서울에서 석 달 동안 별거 생활을 즐기던 준을 결국 대전으로 귀가하게 만들었다. 딸이 절대로 자신처럼 되지 말라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준은 마흔 살의 나이로 대전의 한 병원 침상에서 심징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준이 사망한 후 3년이 지난 1983년 10월 어느 날, 리는 낚시 여행을 마치고 차로 귀가하던 중 빗길에 미끄러져 개천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작가는엄마와 함께 보낸 시간을 뒤로 하고 열일곱에 일본어를 배우고자 일본의 한 국제학교에서 개강한 여름 교육과정을 다녔다. 오카치마치의 한 호텔에 숙소를 정했는데, 학교는 시나노마치에 위치해 있었다.. 도쿄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에 학교는 도시 밖으로 떠나는 료칸旅館 여행을 주선했다. 80여 명의 학생은 남녀로 나뉘어 야외 온천에 입장했다. 언어로 자신을 고립시키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영어를, 그다음엔 한국어와 일본어를 차례로 방어막 삼아. 무서울 정도로 유용했다. 언어는 나를 열어주기도 하지만 내가 닫을 수 있게도 해줬다.
대학교 3학년 봄 학기, 성적이 더 내갔다. 졸업을 하려면 성적을 올려야만 했다. 이에 학업 상담 교사는 시詩를 추천했다. 작가는 시를 쓰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엄마와 할머니에 관한 시를 수백 편씩 썼다. 오직 자신의 머릿속에만 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쓰느라 안간힘을 다했다. 조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학생의 시들은 용서가 없어요.” 조이가 말했다. “어머니를 용서해야 한단 게 아니에요. 실제로 용서하란 말이 아니에요. 하지만 시에서는 그분을 혹은 용서하지 않는 자신을 용서해야 해요. 안 그러면 그건 시가 아니에요.”(195쪽)
2년 후 작가는 뉴욕시의 한 대학원에 입학해 난생처음으로 시詩 워크숍에 참석했다. 대학 졸업 후 1년이 지났을 때 부모님은 7년 만에 켈리포니아로 귀국했다. 뉴욕으로 떠나려고 짐을 꾸리는데 엄마의 전화가 울렸다. "네 오빠가 우리랑 말을 안 하려 해서 이젠 그만 돌아가려고" 오빠는 더는 기다리지 못했다. 아빠는 아들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다면 번역을 하라는 노아 교수의 조언에 따라 작가는 대학원 사무실에 들러 번역을 복수 전공으로 올렸다. 일주일에 두 번씩 받는 일대일 개인교수를 신청했다. 다음 학기엔 학교에서 제공하는 유일한 번역 세미나를 추가했다. 고대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했다.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 부모님은 캘리포니아의 집을 팔고 저축한 돈까지 털어서 워싱턴주에 작은 모텔을 하나 구입했다. 이를테면 수익형 부동산 투자로 생계를 준비한 모양이다.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는 뉴욕시를 떠나 시애틀 근처의 섬으로 이사햇다. 그곳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사진,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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