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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김형민 지음 / 믹스커피 / 2024년 10월
평점 :
이 책을 통해서 ‘역사를 재밌게 만든’, 저마다의 방식과 수단으로 드라마틱한 역전극을, 도는 영웅적 비극을 써낸, 패배로써 역사를 다채롭게 하고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의지로 역사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 그들이 심심한 역사의 균열을 끌어낸 사연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사진, 책표지)
역사는 승자의 역사일 뿐이다. 이는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이 주로 승자이기 때문이다.핮만 승지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지라도 이에 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임을 알면서도 스스로 몸을 던진 셈이다.
‘산하’란 필명으로 더 유명한 김형민 저자는 역사 전공자로 역사 지식 뿐만 아니라 뛰어난 글솜씨로 골수팬들을 팬덤으로 두고 있는 글쟁이다. 그는 다섯 개 장에 걸쳐 언더독의 치열한 저항 이야기들을 펼쳐낸다.
소련에 맞섰던 핀란드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끝나자 마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세계 2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러시아군이 금방 우크라이나를 휩쓸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끝까지 저항하며 현재까지 이 전쟁은 이어지고 있다.
세계사에서 강성한 나라와 민족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의 칼날과 말발굽 아래 무릎 꿇고 사라져 간 민족과 나라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 그럼에도 용기를 떨치든 지혜를 발휘하든 압도적인 강자에 맞서 생존을 쟁취한 희귀한 역사적 사건도 있다.
1939년 나치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나눠 먹은 소련은 발트 3국에 발톱을 들이밀고 사실상 자기들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독재자 스탈린은 이제 핀란드에게 카렐리아, 라플란드등을 포함한 땅과 발트해 항구의 소련 해군 주둔권, 조차권 등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이 협상을 주도한 사람이 소련 외무장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였다. 핀라드측은 이런 요구를 거부했다. 협상이 결렬되자마자 몰로토프는 “대화는 끝났다. 이제는 붉은 군대가 말할 차례다.” 라고 선언했다. 마침내 1939년 11월 30일 소련의 맹공격이 시작되었다. 겨우 인구가 370만 명 정도인 핀란드에 소련의 무력은 마치 폭설처럼 쏟아졌다.
핀란드인들은 소련군 기갑부대(탱크)에 화염병을 투척했다. 가솔린 엔진을 사용했던 소련군 탱크에 상당한 타격을 안겼다. 러시아군에 맞서고자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화염병을 만드는 모습이 뉴스로 전송되었다. 이를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말했다.
불쌍할 정도로 열세에 놓인 핀란드인들은 효율적인 방어책을 고안하고 모든 걸 짜내어 소련에 저항했다. 굽힐 때는 굽히되 단단할 때는 충분히 단단하며, 나아갈 때는 골리앗을 향해서도 거침이 없되 항상 퇴로를 고민하고 살아날 궁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1940년대 골리앗 소련에 맞섰던 다윗 핀란드의 생존 비결이었다.
수나라에 맞선 지혜로운 고구려
동북아의 최강국 수나라에 주변 대부분의 나라는 고개를 숙였지만 고구려는 호락호락 굴복하지 않았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계속 고구려를 압박하자 고구려 영양왕은 먼저 말갈족을 이끌고 수나라 영토를 선제공격했다. 일종의 맛보기 시위였던 셈이다.
이에 수 문제는 격노하고 30만 대군으로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고구려군의 완강한 반격, 장마와 태풍, 전염병 등에 시달린 끝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양양왕은 흥미로운 국서를 수 문제에게 보내 비위를 맞춰 주었다. 자신을 납짝 엎드려 ‘요동분토신遼東糞土臣’(요동 똥 덩어리 땅의 신하)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기고만장해도 부족할 판에 의외로 머리를 굽힌 까닭은 수나라의 즉각적인 재침再侵을 막으려는 꾀였다. 퇴각한 수나라의 피해도 엄청났지만 이를 물리치기 위해 방어했던 고구려도 전후 복구를 위해선 상당한 시일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고구려는 강자를 상대할 줄 아는 지혜로운 약자였다. 여차하면 ‘선빵’을 날릴 줄 아는 과감한 용기를 과시했지만 “저는 똥 덩어리일 뿐입니다”라고 바싹 엎드리며 강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이후 수 문제가 죽고 탐욕스러운 수 양제(수 문제의 둘째 아들)가 즉위하면서 양국 간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고구려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국 최대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기록상으론 113만 여명의 병력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612년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군의 총사령관은 수 양제 본인이었다. 이게 오히려 약점이었다. 황제가 결정하기 전엔 어느 장수도 함부로 적당히 알아서 전투에 나설 수가 없었다. 수 양제는 고구려군이 항복을 표하면 반드시 황제의 명을 기다리라고 전군에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평지에 위치한 요동성은 가히 인해전술로 덤비는 수나라군을 방어하기엔 벅찼다. 성벽을 곧 넘을 위기 상황이 되면 요동성의 수비군은 항복 의사를 타진하며 시간을 벌었다. 수나라군이 황제의 답신을 받을 사이에 원기가 회복되면 재차 성벽에 늘어서서 칼을 번득였다. 이렇게 거짓 항복과 번복을 세 차례나 반복했다.
수 양제도 바보는 아니었다. 요동성 함락이 여의치 않자 별동대 30만 명을 추려서 평양성 공격을 명령했다. 압록강을 넘을 무렵에 수나라군 진영에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당시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사령관과 어떤 담판을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사료史料가 없어서다. 거짓 항복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을지문덕은 적진영에 머물며 수나라 장수들간의 대화를 듣고 ‘군량미가 부족하다’는 이들의 약점을 간파했다.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통털어 배고픈 군대는 가장 허약한 군대로 판명났다. 모험을 걸었던 을지문덕은 재빨리 적진을 탈출하여 고구려군 지휘에 나섰다. 살수대첩을 이끌어 냈다.
여기서 우리들은 교훈을 얻는다. 강대국 수나라가 자신들의 강점을 총동원해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는 상대의 약점을 들여다보았고 그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고자 고구려의 수뇌부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솔선수범했다. 임진왜란 위기 때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명언 ‘죽기를 각오로 싸우면 산다’(필사즉생必死則生)도 고구려 전쟁사를 탐독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희망을 잃지 않은 ‘스파르타쿠스’처럼
트라키아 출신검투사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들에 대한 잔혹한 처우에 반발, 기원전 73년 여름에 동료 검투사 74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처음엔 베수비오 화산 근처의 산록에 은신해 산적질을 하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스파르타쿠스의 능숙한 지휘로 로마의 진압군을 잇달아 격파하면서 그 세를 더 강력하게 키워 나간다.
하지만 정식 군대에 미치지 못하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은 한계를 절감, 철옹성 같은 로마 공격을 포기하고 계속 이탈리아 반도 남쪽으로 향하던 중, 로마군의 총반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던 스파르타쿠스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노예군의 영웅인 스파르타쿠스 사후 약 2천년 뒤 미국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년)는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감동적으로 재창조했다. 로마 장군이 노예군 포로들에게 스파르타쿠스를 가리키기만 하면 모두 살 수 있다고 유혹하자, 여기저기서 “내가 스타르타쿠스다!”라고 외친다.
이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인물은 시나리오 작가 돌턴 트럼보였다. 그는 할리우드에 밀어닥친 메카시즘으로 인해 공산주의자 색출 목적의 청문회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 증언을 거부한 10명중 한 명이었다. 이후 그는 할리우드에서 모든 활동을 차단당했다.
그럼에도 시나리오 쓰기를 중단하지 않던 그는 친구 이름으로 대본을 쓴 <로마의 휴일>(1953년)이 대박을 치며 오드리 헵번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았던 것이다. 그의 가짜 이름 ‘로버트 리치’로 덜컥 29회 아카데미 각본상(영화 ‘브레이브 원’. 1956년)까지 받지만 시상식엔 참석할 수 없었다.
이런 트럼보 앞에 커크 더글러스가 나타났다. 그에게 불쑥 내민 대본은 로마 검투사들의 반란 이야기인 스파르타쿠스였다. 제작과 주연까지 맡은 더글러스에게 할리우드의 메카시즘은 빨갱이로 의심된다는 압박을 가했지만 오히려 트럼보의 이름을 크레디트에 올려버렸다.
(사진, 언더독)
언더독의 재발견
이밖에도 책은 힙스부르크 대군을 격파한 스위스 용벙,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 처참한 몰골을 필름에 담 이기복 사진사의 용기, 히틀러의 암살을 시도한 게오르크 엘저, 파리 코뮌의 여걸 루이즈 미셸 등을 통해 언더독의 치열한 저항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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