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택배
김현지 지음 / 고유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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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일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이 얽히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타인이지만 반드시 나와는 무언가로 연결되기 마련인 가족, 친구, 연인, 동료, 이웃들과 오해와 이해, 불신과 믿음, 멸시와 연민, 희생과 인내, 거부와 수용, 상처와 화해 등을 주고받으며 세월을 걷는 일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그런 일들에 휩쓸려 요동쳤다 잔잔해졌다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김현지 작가는 작년(2023년) 겨울 어느 날 달리던 차 안에서 처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품은 엄마와 딸, 연인, 상사와 직원 등 다양한 관계의 꼴을 통해 삶의 장면 속 미묘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조명한다.


도서의 제목이기도 한 단편 ‘엄마의 택배’에 대한 감상평으로 서평에 갈음하려 한다.


모든 자식들은 엄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특히, 딸은 아들에 비해 훨씬 더 섬세한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싶다.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딸은 사남매 형제중 서열 3위에 해당하는데, 그녀 또한 그러하다고 보여진다.


소설의 이야기는 강원도 모처에 살고 있는 엄마가 딸에게 보낸 택배 소식으로 시작된다. 과거엔 손수 손에 든 보따리나 등짐에 전달할 물건을 지고 자식들에게 향하는 부모의 모습들이 많이 목격되었다. 산업화의 시작과 함께 시골의 자식들은 서울로 상경해 일터에서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대화된 지금의 삶은 이를 업으로 삼는 업자들이 있어서 집에서 편하게 전달된 물건을 받기만 하면 된다.


택배 박스는 혼자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닐 정도로 여러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박스를 열자 비린내가 코를 엄습한다. 아마도 오징어란 생각을 갖고서 해체 일을 이어간다. 제일 위엔 뭉그러진 바나나 송이였다. 3시간 이상 걸려 도착할 택배 상자에 바나나라니.


이는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사랑의 한 줌이 분명하다. 뭐든 하나라도 더 주려는 게 엄마의 심정일테니 말이다. 바나나를 걷어내자 예상과 달리 가래떡이 나왔다.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지퍼팩 3개엔 어묵이 구깃구깃 담겨 있다. 마침내 오징어가 보인다. 위생백에 담겨 지금은 녹는 중인지 봉지 표면이 축축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제각각 형태의 내용물 틈 사이사이로 사과와 오렌지 몇 알이 채워져 있었다. 소위 완충재로 사용된 듯하다. 택배를 보냈는데 잘 도착했느냐고 물어온 전화엔 오징어가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어제 오후 전화엔 가래떡과 어묵을 보낸다는 연락이었는데 보내는 김에 이것저것 다 담은게 분명해 보였다.


비린 걸 유독 싫어하는 딸에게 오징어가 반가울 리 없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청소기를 돌릴 때 현관 앞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오징어가 상할까 봐 걱정 하는 엄마에게 택배를 잘 받았다고 메시지부터 보냈다. 아무튼 엄마의 택배를 받는 자식은 오직 이 딸뿐이다.


첫째 딸은 호주로 발령난 남편따라 외국에서 살고 있고, 둘째 아들은 의대를 나와 현재 지방 소도시에 개업한 내과의이며, 막내딸은 부잣집 외동아들과 결혼해 비싼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가 보기엔 소설의 주인공인 셋째 딸에겐 뭐라도 보태줘야 한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택배 박스에서 꺼낸 모든 내용물을 주방 조리대 위에서 검수했다. 싱크대에 놓인 사과와 오렌지는 비린내가 여전한 듯했다. 아무튼 엄마가 보낸 정성을 감안해 표면을 박박 문질러 씻었다. 사과가 여섯 알, 오렌지가 다섯 알이었다.


다음엔 가래떡을 도마 위에 올렸다. 살얼음이 끼어 있는 떡에선 쾨쾨한 냉동실 냄새가 났다. 엄마집 냉장고에 있던 가래떡을 보낸 게 분명해 보인다. 배송 도중 반쯤 녹은 상태라 칼로 쉽게 자를 수 있었다. 냉동 보관통에 옮겨 담던 중 흰 가래떡에 붙어 있는 곰팡이를 발견했다. 아마도 엄마는 이를 모른 채 보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났다. 살고 있는 형편을 떠올리며 자격지심이 발동한 것이다. 생각 같아선 택배 째로 내다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비굴한 마음이 올라왔다. 어묵 상태는 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과일은 깎아 먹으면 되지? 이걸 돈으로 사라면 알마인데? 등등.


갑자기 어릴 적 엄마가 먹던 개미밥이 생각났다. 냉장고가 없던 그 시절, 남은 밥을 부엌 한켠에 둔 허술한 보관 탓에 밥알 사이에 개미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엄마는 이 밥이 아까워 절대 버리지 못하고 저녁상에서 삼키고 있었다.


곰팡이가 난 부분을 도려내곤 아무 일도 없는 듯 가래떡을 냉동 보관통에 옮겨 담았다. 꽉 채운 통을 냉동실에 넣었다. 그리고 아이들 먹일 간식용 가래떡을 새로 주문하기로 맘 먹었다. 어릴 적 보았던 엄마의 개미밥처럼 딸은 곰팡이가 생긴 가래떡을 도저히 버릴 수기 없었다.


주인공인 딸은 첫 신혼살림을 30년 된 15평짜리 낡은 아파트에 차렸었다. 집주인은 월세 벌이를 목적으로 세입자들만 살았는데 30년째 리모델링 한번 없었다. 화장실과 주방 타일 사이사이 곰팡이가 끼어 있었고 베란다 새시도 부실해서 바람이 심한 날은 덜컹거렸다. 이 집을 방문했던 엄마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이후 딸은 내 집 갖는 게 삶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후 지방 작은 도시 변두리에 25평짜리 자가를 구입하곤 제일 먼저 엄마에게 이를 알렸던 것이다.


칭찬 받으려고 연락했는데, 엄마의 반응은 의외였다. 집 사는 게 그렇게 우습니? 네 식구가 어떻게 살아? 얼마 짜리 집이냐? 대출은 얼마를 받았냐? 등의 질문이 이어지며 끝내 좋아하는 말 한 번을 해주지 않았다.


“가난이란, 형편이 좋아진다고 해서 옷을 갈아입듯 쉬이 그 태를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엄마가 매번 보내오는 택배만 봐도 알고 남음이라고 생각할 때, 그녀의 입술은 냉소로 뒤틀렸다.”


어느 날, 딸은 엄마가 대신 납부해주던 자신의 보험료를 이젠 정리하기로 맘 먹고 엄마에게 이젠 내지 말라고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내주고 있는 내 보험 있잖아. 그 보험료 앞으론 내 통장에서 나가게 자동 이체 바꾸려고”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듣고 있냐고 다그치자 엄마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울먹이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것마저 가져가려고 그러니? 다 떠나고 그거 남았는데. 그것마저 가져가려고?”


이 딸을 제외한 세 자녀는 줄 수 없는 것을 그녀만은 엄마에게 줄 수 있다. 그녀를 통해 엄마는 자신의 쓸모를 재차 확인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남을 동정해 보는 사치도 누려볼 것이다. 엄마도 일생에 단 한 번은 그런 여유와 사치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오징어를 손질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양파를 채 썰고, 당근과 콩나물까지 넣어서 매콤한 양념으로 볶아 한쪽에 담고 접시 다른 면엔 잘 삶아진 소면을 똬리 틀어 올렸다. 참기름과 통깨로 화룡점정한 후 요리를 저녁상 한가운데 놓고선 사진을 찍었다. 입을 쫘악 벌이는 남편에게 지나가는 말로 엄마가 보낸 준 거라고 말했다. 엄마에게 사진을 보내고 메시지를 적었다.


“보내준 오징어가 싱싱해 보여서 바로 요리해 먹었어요. 정말 맛있더라고. 엄마 덕분에 정말 잘 먹었어. 고마워.”


하얀 거짓말.

부모와 자식 간엔 흔한 말이다.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헤아리기에 아파도 안 아픈 척, 고파도 배부른 척, 슬퍼도 웃는 척, 없어도 있는 척, 행복한 척... 딸의 저녁은 이렇게 익어 간다.


삶은 관계의 연속


이밖에도 작가의 단편소설은 인연, 이차장, 운동화, 계란말이, 나의 글·나의 소명이란 제목으로 이어진다. 앞서 살펴본 엄마와 딸의 관계 뿐만 아니라 연인관계, 상사와 직원 관계 등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 삶을 조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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