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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선물 - 세상을 떠난 엄마가 남긴 열아홉 해의 생일선물과 삶의 의미
제너비브 킹스턴 지음, 박선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8월
평점 :
지난 20년간 상자는 늘 나와 함께했다. 대륙을 가로질러 주와 주를, 아파트와 아파트를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이삿짐 트럭이 떠나고 나면 나는 제일 먼저 상자를 보관해 둘 장소부터 찾았다. 상자는 주로 가구 사이의 좁은 공간이나 옷장 깊숙한 곳에 놓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상자를 보호했고, 어딘가에 잘 숨겨두었다. 상자는 매년 조금씩 가벼워졌다. 이제 상자에는 세 개의 물건만 남아 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사진, 책 표지)
책은 사랑하는 엄마의 암 투병기이자 죽음에 앞서 엄마가 어린 딸인 저자 제너비브 킹스턴에게 남긴 여러 통의 친필 편지와 함께 동봉한 선물 상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엄마와 딸은 생일이 같은 날이었다. 딸을 위해 생일에 맞춰 준비해왔던 엄마의 판지 선물 상자엔 사랑의 힘이 담겨 있었다.
엄마의 유방암은 뼈로 뇌로 퍼져나갔다. 암의 전이轉移 현상이다. 암이 이토록 무서운 질병으로 인식되는 이유엔 이같은 전이 때문으로 온몸이 황폐화되는 셈이다. 이를 이겨 내려면 통상 항암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독하디 독한 항암제는 멀쩡한 머리카락이 쑥쑥 빠질 정도로 온몸에 고통을 안기며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 그렇다. 잠시 목숨을 연장할 뿐이다. 물론 현대의학은 초기 암의 경우 항암제로 완치를 이루어내기도 한다.
어느 수요일 밤, 곧 12살을 앞둔 저자에게 잊지 못할 일이 다가왔다. 아래층에서 오빠는 워크래프트라는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있었고 이런 오빠를 구경하고 있을 때 위층에서 아빠가 위층으로 올라오라는 호출이 있었다.
아빠는 엄마의 시신을 양팔에 안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흘린 눈물이 너무나도 많은 탓인지 이 광경을 목격하고도 어린 딸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마도 눈물샘이 말라버린 것 같았다.
입고 있던 엄마의 옷을 벗기자 엄마의 왼 가슴엔 종縱으로 길다란 수술 흉터와 함께 젖꼭지도 없는 민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등 쪽엔 허리 수술로 생긴 흉터가 척추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얼굴과 몸은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인해 퉁퉁 부어 있었다.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은 짧았고 뇌로 전이된 암의 수술 때문에 이마에도 상처가 남아 있었다.
한편, 엄마는 일반적인 치료가 아닌, 검증되지 않은 낯선 치료법을 선택했다. 이미 지난 일을 되돌릴 수 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엄마를 찾아가 이는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초기부터 방사선 치료와 함께 화학 요법을 받았다면 엄마는 생존의 기회를 얻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고 나름 올바른 치료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 그웨니에게
이건 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편지와 유품들의 기록이란다. 혹시라도 편지와 유품에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기록을 남겨두었어. 이걸 쓸 때 사용했던 펜도 함께 넣었어. 네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구나. - 사랑하는 엄마가
(사진, 엄마의 탄생석 반지)
‘엄마가 살아계시면 좋겠어요. 엄마가 건강해지고 다시는 암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76쪽)
이처럼 책은 온통 엄마와 딸, 그리고 가족들과 연관된 추억으로 물들어 있다.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사진들과 엄마의 편지들로 꽉 차 있다. 난 책을 읽는 내내 암으로 병원 병상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일이 떠올랐다. 점점 잊혀져가는 기억들을 소환하자면 아버지는 유독 둘째 아들인 나에게 매우 엄하셨다. 남자는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결론지어 진다면서 어릴 적 종아리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글쓰기를 가르쳤다. 자랑이지만 나의 국민학교 학습노트는 전교생들에게 모범 사례로 전시되기까지 했었다.
아버지의 훈육 덕분에 성공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사회인으로 직장 생활을 즐겼지만, IMF 위기를 겪으며 재무담당 임원직을 마감하고 사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 주전공은 금융과 회계 지식으로 무장된 투자 업무에 남다른 특출함이 있었기에 이를 나의 사업 아이템으로 결정했다.
내가 투자한 회사의 CEO로 재직시 맞이한 어느 설날에 설차례를 마친 후, 온가족이 둘러앉아 음복飮福을 즐길 때 아버지는 허리가 계속 아프다고 하시기에 설연휴 끝나는대로 종합병원에 들러 검사할 것을 권하고 상경했다. 병원에선 아버지의 척추뼈에 함몰이 생겼으므로 간단한 시술과 회복을 위해 일주일 정도 입원이 소요된다고 했다. 이후 추출된 뼈조각에서 암으로 의심되는 징후가 발견되어 MRI 촬영 등으로 정밀 검사 끝에 암이 이미 전신에 전이되었으므로 항암 치료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된다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심한 통증이 발생될 때 진통제를 투여하는 등 연명치료를 행하다 약 2개월도 못되어 병상에서 8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셨다. 한동안 아버지에게 척추 시술을 권했던 내 탓에 일찍 사망한 것 같아 밀려오는 자책감으로 매우 혼란스런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보자. 저자는 엄마를 잃고 몇 년 동안 상자의 내용물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딸을 위해 준비한 엄마의 선물들에 감탄하면서 편지와 카드 등을 읽고 이를 잘 정리해서 안전하게 보관하려 했다. 그랬다. 엄마는 자식들이 맞이할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상자를 남겼던 것이다.
(사진, 아빠의 메모)
한편, 아내를 잃은 아빠는 아들, 딸 두 자식을 잘 키워내었지만 무언가 헤아릴 수 없는 고독감과 상실감이 점점 커져만 갔을까? 어느 화요일 오후, 감히 상상도 못한 끔찍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저자의 아빠가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만 것이다. 현장을 목격한 경찰관과 통화를 마친 저자는 오빠에게 이 사실을 전화로 알렸다.
과거 아빠 엄마와 함께 살았던 집에 지금은 새엄마와 새엄마의 아들이 살고 있다. 평소 아빠는 딸에게 많은 메모를 써주었던 분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엔 이렇게 침묵을 선택하고 말았다. 늦은 밤 집에 도착하니 예전부터 늘 휴대하고 다니던 아빠의 가방이 현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어릴 적엔 이 가방을 보고 집에 아빠가 계신지 여부를 판단했었다. 가방 속엔 아무 단서도 없었다.
서른 번째의 생일이 지나고도 판지 상자 안엔 3개의 포장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빨간 딸기 그림이 그려진 상자로 ‘약혼’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다음 상자는 곰 그림이 있는 깡통에 ‘결혼’이라고 적힌 카드가, 마지막 포장은 보드지 상자에 ‘첫 아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진, 약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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