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오만필 - 야담문학의 새로운 풍경
정현동 지음, 안대회 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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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오만필>은 지금으로부터 얼추 40년 전쯤인 1984년 어름에 처음 만났다. 연세대학교에서 고서를 정리하는 일을 도우면서 작디작은 글씨로 단정하게 필사한 책을 보았다. 몇 년 사이에 들어온 듯 목록에도 오르지 않은 책이었다. 생소한 이름의 책을 앞 대목부터 읽어 보니 낯설고 재미난 이야기가 흥미를 끌었다. - 서설 중에서




책의 저자는 지금까지 온전히 무명의 인물로 남아 있던 정현동鄭顯東(1730~1815년)이고, 지은 시기는 1812년이다. 그는 남인南人 사대부로 선대부터 경기도 광주廣州 경안慶安에 살았다. 같은 지역에 거주한 저명한 학자 안정복安鼎福의 문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재야 지식인으로 86세를 살면서 견문한 야담과 실화 194화를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야담과 필기로 구성되어 다른 야담집이나 필기류 저술에선 보기 힘든 새로운 이야기를 풍성하게 수록했는데, 상권에는 ‘이어라는 제목으로 86화, 하권에는 ‘고사古事’라는 제목으로 108화가 실려 있다.


비렁뱅이란 거지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책의 첫 번째 이야기는 비렁뱅이의 출세기를 다룬다. 충주에 사는 이씨 성의 한미寒微한 사람이 고아 하나만 남기고 죽었는데, 이 사람의 벗이 고아를 거두어 양육했다. 또 부모를 여읜 여자아이 하나가 있어 서로 엇비슷하므로 둘을 결혼시켰다. 그런데, 1년도 못되어 이 벗이 죽자 의탁할 곳이 없는 이생李生은 영남嶺南이 인심이 후하고 의식이 넉넉한 고장이란 말을 듣고 무작정 쪽박만 챙겨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났다.


웅천熊川(현재의 창원시 진해구 일대에 위치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 고을에 이르자 이생은 아내를 시냇가에 남겨 놓고는 한 사대부 집에 들어가 점심밥을 구걸했다. 사내아이는 책을 읽고 있다가 점심밥을 다먹었다고 했다. 잠자던 노인이 소음에 깨어나 비렁뱅이의 밥동냥 얘기를 듣고 밥상을 내오라고 했다.


밥상이 나오자 노인은 이생에게 점심밥을 주었다. 이생이 받은 밥의 반을 쪽박에 나누어 담자 노인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데리고 온 아내 얘기를 들은 노인은 바로 여종을 불러 시냇가에 있는 여인을 모셔오라고 명했다. 이생의 아내도 점심밥을 잘 먹었다.


식사를 모두 마친 후 이생의 자초지종 얘기를 들은 노인은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고서 이 고을에서 지내라며 비어 있는 집 한 채를 제공하고 양식거리를 보내 끼니를 해결토록 해주었다. 노인이 이생에게 글 읽기를 권하니 옛 문장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정식程式(표준이 되는 방식)을 대충 이해했다.


몇 년이 지나 임금이 친히 왕림하는 정시庭試(임시적인 특별 과거시험)가 시행되니 노인은 이생에게 상경하여 곽거에 응시토록 했다. 이생은 글재주가 부족하다며 사양했지만 노인은 노잣돈까지 주면서 그냥 한번 해보라는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는 길에 이생은 밥을 사 먹기도 빌어먹기도 하면서 마침내 도성에 들어섰다. 딱히 갈 곳이 없던 차에 둘러보니 마침 길가에 장대가 가로질러진 문 하나가 보였고, 그 안쪽에 작은 마루가 하나 보였다. 지친 다리를 풀 겸해서 들어가 앉았더니 한 처녀가 중문中門 안쪽에서 이 상황을 엿보고 있었다.


이후 의관을 갖춰 입은 이가 이생에게 무슨일이냐고 묻자 영남땅에서 과거 보러 온 선비임을 밝히자 자신의 아우가 글씨에 능하니 함께 시험장으로 가면 좋겠다면서 조용한 곳에서 편히 쉬라는 것이었다. 아우는 호조 서리로 일하느라 과거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금천 고을로 물러나 과거를 준비한다고 했다.


과거 시험 전날 집주인의 아우가 왔다. 한밤중에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을 반쯤 열고 종이에 싼 물건 하나를 던져 놓고 가자, 이생은 바로 주워 이를 소매 속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새벽 과거장에 입장했는데 시권試券(글을 지어 올리는 종이)을 제출할 길이 없어서 36계 줄행랑 궁리를 했다. 소매 속의 종이에 싼 물건을 꺼내 요깃거리를 먹고나니 시제試題가 내걸렸다. 이런 행운이 있을까. 요깃거리를 싸고 있는 종이는 개인 문집이었는데 제목이 시제와 동일한 두 편이 있었다. 이에 이를 몰래 베껴 쓴 다음 서수書手(과거장에서 글씨를 대신 써주던 사람)에게 넘겨 가장 먼저 답안을 과거장에 제출했다.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이생이 갑과甲科로 합격하고 집주인의 아우는 을과乙科로 합격했다. 참고로 최고득점자 3인을 갑과로, 차점자 7인을 을과로, 그 다음 득점자를 병과丙科로 나누어 석차를 매겼다. 이생은 하사받은 말을 타고 유가遊街를 하면서 저녁이 되어 주인집에 도착했다. 이미 동네는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에 이를 궁금히 여긴 이생이 집주인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답했다.


집주인 부부가 친척 집의 혼례에 참석하고 딸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집에 귀가하자 딸이 새벽에 꾼 꿈을 말하길 ‘황룡이 하늘에서 내려와 작은 마루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 낮이 되어 나그네가 와서 작은 마루에 앉았는데 똬리를 튼 황룡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집주인은 용꿈은 우연이 아니어서 이런 경사가 생겼다며 딸이 침석枕席을 모실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생이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내다 본 처녀가 바로 딸이었으며, 과거 전날 요깃거리를 싼 종이를 던지고 간 사람 또한 딸이었다. 이 딸은 이생의 첩이 되었다.


이생이 앞서 만난 노인 또한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아 비렁뱅이를 한번 보자마자 집에 머물러 지내게 하였고, 또 과거에 응시하기를 권하였다. 아! 길흉화복은 모두 미리 정해져 있으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해 볼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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