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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스크린을 넘어 스토리가 되다
허은.이은숙.정영희 지음 / 조윤커뮤니케이션 / 2023년 10월
평점 :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여성들에겐 대체로 나이가 차면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 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가족 형태와 기능이 빠르게 해체되어 가면서 가족의 실질적인 본딩 역할을 담당하던 여자들이 변화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이 책은 미디어 연구자, 드라마 연구자, 그리고 여성지 편집장 등 세 명의 필자가 모여 K드라마, 여성 영화, 예능, 팟캐스트, 웹툰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여성의 모습이 어떠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에 관해 주요 작품의 분석을 통해 살펴본 대중문화 비평서이다.
장르별로 작품을 분석하거나 페미니즘 이론을 적용한 전문 비평은 아니지만 미디어가 담아내는 여성의 모습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살펴봄으로써 이 시대를 관통하는 주체적인 여성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이해하고자 했다. 나아가 미디어에 노출된 여성주의 시선을 확대, 재생산하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책은 크게 여성의 캐릭터, 몸, 연대, 모성 등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1장(캐릭터)은 개혁적인 여성 캐릭터 내용을, 2장(몸)은 대중문화 속에서 당당하게 스스로를 표현하는 여성의 몸을, 3장(연대)은 여성 간의 관계를 조명하는 연대 앃기를, 4장(모성)은 과거와 많이 달라진 능동적이면서 자유 의지를 지닌 모성을 각각 주제로 다룬다.
여성의 캐릭터
가부장제 사회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던 기존의 여성들과 달리 스스로 욕망하고 성취하는 여자들이 드라마의 주인공 또는 주역으로 등장했다. 먼저 2022년 12월 초에 종영한 16부작 K드라마 <슈롭>에선 가장 바쁘고 유능한 조선시대 워킹맘 ‘중전’(김혜수가 연기)를 통해 주체적인 여성을 재발견하도록 한다.
(사진, 옷소매 붉은 끝동1)
또 왕과 궁녀의 사랑 스토리를 담은 퓨전 사극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2021년)은 조선 22대 왕 정조와 궁녀 덕임 간의 로맨스도 주요한 내용이지만, 남성 위주의 조선시대에서 비천한 신분의 한 여성이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서사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즉 덕임은 비록 궁녀라는 하찮은 신분임에도 주체적인 삶을 원했기에 열심히 일하고 동료들과 우정을 쌓으며 스스로 자신을 책임지는 인생을 추구했다. 이는 기존의 사극에서 보여주었던, 왕의 승은承恩을 입고 졸지에 신분상승함을 목표로 삼았던 궁녀와는 매우 다른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사진. 옷소매2)
2022년 방송된 드라마 중 단연 돋보였던 수작秀作은 바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였다. 주인공인 우 변호사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지녔다. 기존의 드라마에선 미혼모가 온갖 고생을 겪으며 아이를 키우고 반대로 애인을 버린 남자는 성공대열에 합류한다. 세월이 한참 흘러 우연히 마주치는 게 전형적인 스토리였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정반대 상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귀던 애인에게 버림받고 졸지에 미혼부가 된 영우의 아버지는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자폐증세를 보이는 딸의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한다. 반면 갓난아기를 매정하게 버린 생모는 법무부 장관 후보로 물망에 오를 정도로 성공한다.
여성의 몸
대중문화가 여성의 몸을 담아내는 방식은 페미니즘 연구자들의 주요 논제 중 하나였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몸을 생물학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특성과 의미가 투영된 사회적 산물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몸은 개인의 욕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통제되었다. 여성들의 외모가 실력보다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평생 다이어트와 외모 가꾸기에 시달려야 했다.
여성의 몸은 응시의 대상, 즉 바라보는 사람의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그 주체는 남성이었다. 그래서 대중매체는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동안과 풍만한 몸매의 ‘베이글녀’까지 등장시켰다. 그러다가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귀엽고 사랑스런 모습만으로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다.
(사진, 골때녀)
<골 때리는 그녀들>은 여자 축구인들이 축구에 몰입하면서 여성의 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 예능 프로그램이다. 스스로 운동선수에 걸맞는 몸을 만들어 활동했다. 고대 스파르타 여성들도 그러했듯 강한 몸과 체력이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사진, 스우파)
또 <스트릿 우먼 파이터> 전사들이 무대를 압도하는 모습은 당당하게 섹시한 게 뭔지 알려준다. 섹시함은 보는 이를 위한 게 아니라 춤의 한 표현 방식이다. 노출이 심한 옷도 오직 그 춤을 위한 기능적인 복장일 뿐이다. 여성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내는 불편한 카메라 앵글 대신 파워풀하고 당당한 섹시로 무대를 장악한다. 자유로운 그들에게 여성이 더 환호한다.
연대(함께 성장)
기존의 대중문화 속에 비춰지는 우정은 대부분 남성의 것이었다. 이젠 여성의 성취가 높아지고 영향력 또한 커지면서 여성들의 우정에 대한 택스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성들 간의 우정과 친구 관계가 극劇의 메인으로 전개된다.
(사진, 서른아홉1,2)
죽마고우라는 사자성어를 우린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말엔 은연중 남성 편향성이 내포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말타기와 전쟁은 남성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 편향성에 도전한 드라마 <서른 아홉>(JTBC, 2022년 12부작)은 우정이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여성들의 섬세한 우정을 소개한다. 친구의 부모도 내 부모와 마찬가지고, 가족을 부탁할 수 있고, 죽음 이후를 챙길 수 있는 관계는 남성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사소한 고민부터 무거운 고민까지 속 시원하게 풀어드리는 비밀보장 상담소’를 표방하며 개그우먼 송은이와 김숙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예능 방송 <송은이&김숙의 비밀보장>은 수많은 전체 팟캐스트 중에서도 10위권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제작을 담당하는 ‘컨텐츠랩 비보’는 송은이가 설립한 콘텐츠 제작사이다.
성공의 가장 큰 지분은 두 개그우먼의 몫이다. 송은이의 탁월한 기획력과 성실성, 김숙의 독특한 세계관과 진행능력이 만나서 시너지를 발휘한 셈이다. 또 이들의 폭넓은 인맥 네트워크는 고민상담실의 각종 전문가 섭외와 재미를 주는 요소로 작용했다.
<비밀보장>의 주된 청취층인 젊은 여성들은 약자의 입장인 확률이 높다. 인생살이에 경험 부족한 이들에게 친구처럼 그들의 고민을 공감해주며 해답을 제시하려 노력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서사가 중심이 된 예능 프로그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모성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모성’은 ‘여성이 어머니로서 발현하는 본성’이다. 여성은 ‘모성애’라는 생물학적, 태생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통념과 연결된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에게도 잠재적인 어머니로서 돌봄이 미흡할 경우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모성 관념에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서구의 여성주의자였다. 1960 말~1970 초에 이들은 ‘모성은 여성의 타고난 본능이 아니며 사회적 산물임’을 거론하며 모성신화의 허구를 지적했던 것이다. 심지어 1980년대에 들어선 어머니가 되지 않을 권리로까지 확장시켰다.
tvN 16부작 드라마 <마더>(2018년)는 기존의 모성에 대한 서사 관습을 깨고 모성은 여성의 의무가 아니라 주체적인 선택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버려진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수진(이보영이 연기)은 보육원에 봉사활동 나온 톱배우 차영신(이혜영이 연기)에게 입양된다.
(사진, 모성)
영신의 사랑 속에 훌륭한 조류학자로 성장했지만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수진은 아이슬란드 연구소로 떠나기 전 한 초등학교 임시교사로 일하던 중, 학대받은 흔적이 역력한 혜나를 데리고 마을을 떠난다. 혜나의 친모 자영은 납치 신고를 하고, 이 두사람은 도망자 신세가 된다. 결국 수진은 체포되어 실형 선고를 받고 2년 동안 혜나에게 접근 금지를 받는다. 이후 두 사람은 정식 입양을 통해 모녀 사이가 된다.
이 드라마는 출산 여부와 상관없이 한 생명과 나의 관계가 모성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즉 생물학적 관계와 무관하게 서로가 서로의 삶에 의미가 되는 과정에서 단단해지는 모성을 보여준다. 낳지 않아도 내가 키웠으면 내 친딸이라는 영신은 화려한 배우로 살았지만 자신의 삶을 채우는 건 부, 명예, 인기가 아닌 온전한 사랑을 주고받는 단단한 관계임을 모성이라는 틀에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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