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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로 여는 아침 - 마흔, 삶의 무기가 되는 고전 읽기
김훈종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2월
평점 :
매일 아침, 나는 마음을 정화시키는 고전을 읽으려 한다. 잠시나마 그 순간만큼은 분명 기븜이 삶을 가득 채우는 소중한 순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쌓여가는 아침으로 나는 마침내, ‘현재를 살아라!’라는 저 위대한 외침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이뤄낼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요즈음의 세태가 그 어느 때보다 매우 어렵고 혼탁스럽다. 경제는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코로나 후유증을 겪고 있는 중이며, 사회는 일부 몰상식한 정치인들의 선동으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두 패로 나뉘어 대립하는 갈등 국면이다.
한편,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나라가 어찌 되든, 사회가 어찌 되든 나만 잘 먹고 잘 지내면 된다는 편협한 사고 방식을 가진 이들의 가치관은 급기야 ‘아시비타’我是非他(‘내로남불’)라는 해괴망측한 궤변주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이 책은 총 2부에 걸쳐 29 가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하루 한 편씩 아침에 읽는다면 고민 해결과 함께 미라클 모닝이라는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될 것이다. 짧은 서평 속에 책의 내용을 모두 담을 수는 없는 노릇, 내게 감동을 준 내용을 서평으로 갈음하려 한다.
내 편이 없다?
난 거의 매일 아침 산책을 즐기려 동네인 ‘덕은지구’(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를 크게 한바퀴 돌아서 귀가한다. 하절기엔 아침에 주변의 대덕산 산행으로 대신한다. 요즈음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산책시 애완견을 데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어찌 보면 애완견이 아니라 ‘반려견’이 옳은 표현이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우리들은 내편이 있기를 바라는 듯하다.
과연 최고의 내편은 누구일까? 그렇다. 바로 자신의 배우자이다. 배우자는 나를 가장 아껴주는 친구이기에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함께 살며 서로의 살갗을 부댓끼면서 동고동락을 하는 존재이다. 좋을 때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사람이 배우자인 셈이다. 그래서 조강지처糟糠之妻란 고사성어도 출현한 것이다. 즉 가난할 때 술지게미와 쌀겨를 함께 먹으며 고생한 아내를 집에서 내치면 안된다는 가르침이다.
굳이 결혼을 통해 내편인 반려자를 얻지 않아도(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결코 비혼주의자는 아니다) 불후의 명저이자 영원한 고전으로 대표되는 <논어>도 누군가에겐 충분히 인생의 반려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고전은 삶의 지표가 되어주므로 반려의 조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자란 나를 바가지 긁는 일도 없고, 뭘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으며, 술에 취해 늦게 귀가했다고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또한, 화 난다고 몇 날 며칠 나를 투명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얼굴을 마주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 웃는 얼굴로 품안에 소옥 들어와 재미와 감동, 그리고 지혜 주머니까지 펼쳐 보인다. 이 정도면 최고의 반려자 아닐까 싶다.
책만 보는 바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 그의 별명은 ‘간서치’看書痴다. 오죽 했으면 이런 별명을 얻었을까? 그는 서얼 출신이라 뛰어난 학문을 갖추고 있어도 나라의 인재로 중용되지 않았다. 언감생심인지라 벼슬길은 포기하고 살았는데, 조선 후기 최고의 성군聖君 정조가 즉위한 이후에 비로소 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었으니 뭐 그리 대단한 자리는 아니었다.
책 읽는 것 말고는 특별히 잘 하는 재주가 없었던 그는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피할 수 없었는데, 추운 겨울에 땔감이 없어서 냉방에서 떨면서 잠을 잤다고 한다. 하루는 너무도 추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서 <한서漢書>를 덮고 <논어論語>를 병풍 삼아 한기寒氣를 막았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이니 당시 함께 살았던 아내 백씨白氏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안 봐도 비디오란 생각이 든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데, 그는 어떤 길을 보았는지 아직도 여전히 궁금하다. 아무튼 이런 간서치를 더 알고 싶은 분들에게 내가 읽었던 2권의 책을 소개한다. <미쳐야 미친다>,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인데, 두 권 모두 한양대 정민 교수가 쓴 책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중학생 시절, 국어 선생님이 큰 글자로 칠판에 쓴 후, 이를 따라 읽도록 했다. 공자님 말씀이었다. 아마도 학생들에겐 <논어> 중에서 가장 유명한 대표선수일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난 선생님의 ‘배우는 게 즐겁다’는 해석에 대해선 의문을 가졌으며, 심지어 미끼라고 여겼다.
이 가르침의 글에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바로 ‘습習’이라는 한자어다. 익히 우리가 알듯이 한자어는 상형문자이다. 의미를 상징하는 그림인 셈이다. 이 글자를 분해分解하면 ‘깃’을 의미하는 우羽와 숫자 ‘100’을 의미하는 백白으로 구성된다. 이를 파자破字라고 하는데, 해석에 활용하려는 일종의 방법이다. 따라서 '새의 날개짓 100번'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동물의 세계라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다 보면 알에서 부화한 새끼새는 한동안 날지를 못한다. 물론 ‘날 수 있다’는 DNA가 몸 속에 흐르고 있겠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금방 날 수는 없다. 그렇다.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한자어 ‘습習’은 바로 이런 의미인 것이다. ‘100번의 날개짓’은 바로 연습이자 공부인 셈이다. 창공을 즐겁게 날아오르는 새를 보라. 얼마나 많은 좌절과 인내를 통해 이루어낸 결과물인가 말이다. 이처럼 배움이라는 과정엔 ‘익힘’이라는 수많은 연습과 공부가 있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좌절과 인내라는 ‘담금질’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명품 또한 수천만 번의 담금질 속에 탄생함을 깨달아야 한다.
너무 조급하지 말라.
느려도 괜찮다.
오직 ‘중꺾마!’만 필요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