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금 1 - 왕의 목소리
임정원 지음 / 비욘드오리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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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침전 밖으로 나섰다. 무관들이 앞장서고 그 뒤에 정중금 홍정택이 섰다. 효명과 재운은 행렬의 끄트머리에 가서 섰다. 대열이 갖추어지자 홍정택이 주위를 살피고는 목을 가다듬은 뒤 낮고 깊게 외쳤다. ‘행차行次’ - ‘32쪽’ 중에서




중금들의 수장은 정중금이다. 한번은 이재운이 왕의 아침잠을 깨우는 일에 효명과 함께 했는데, 효명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하, 기침하시옵소서”라고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효명의 연속되는 ‘전하’에도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재운은 옆구리를 찔리자 “아야!”를 외쳤다. 효명이 잠을 깨우려고 살짝 팔꿈치로 찔렀기 때문이다. 이에 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엇이냐?”, 입직 내시는 기쁜 나머지 재운을 탓할 새도 없이 문을 열어보니 보료에 누운 채로 왕은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하, 기침하시옵소서.”

“진즉에 기침하였다.”

“기척이 없으셔서 걱정하였사옵니다.”

“눈을 뜬다는 것이 괴로워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비명은 신선했다.”


왕의 말을 들은 재운은 효명에게 눈을 찡긋하고선 고개를 들어 침전 안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이밀었다. “전하, 그러면 어떤 것이 전하를 깨울 수 있사옵니까?” 감히 중금 따위가 왕에게 질문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선내시는 얼굴에 노기怒氣를 띠었다. 왕은 재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쩍쩍 갈라진 메마른 땅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풋풋했다. 묘한 매력을 갖춘 젊은이였다.


“매일매일 네 얘기가 듣고 싶어 아침이 기다려진다면야 어떤 상인들 못 내리겠느냐.”


이 일은 내명부와 내시들, 중금들, 궁녀들, 금군들, 그리고 궁을 출입하는 신료들 사이에 엄청난 화제거리가 되고 말았다. 결국 눈 밖에 난 행동으로 인해 재은은 중금 업무에서 한달 동안 배제되는 근신 처분을 받았지만 평소 홀로 연모하던 상의원 궁녀 향안을 실컷 볼 수 있을 것 같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재운은 그동안 궁궐 내의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잡일은 오히려 재운의 적성에 잘 맞았다. 그중에서도 사냥매를 사육하는 북악산의 응방과 늙은 내시 고우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근신 처분 기한이 종료되고 재운은 중금에 복귀했지만 평소답지 않게 말이 적고 신중한 행동을 했다. 이런 재운의 변화를 단짝 효명은 금새 알아 차렸다. 어느 날 효명이 재운에게 ‘국금國禁’에 대해 얘기했다. 자신이 오래된 서고에서 필리핀 책을 접했는데, 책 속엔 이에 대한 서찰이 있었다는 거다. 이런 얘기에 재운이 놀라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이재운 중금, 국금이 되어라.”


왕이 이렇게 말했다. 근신 처분이 해제되는 날, 재운은 응방을 찾았다가 늙은 내시 고우익이 사육장 청소를 부탁하길래 심란한 마음도 달랠 겸 사냥매의 똥을 치웠다. 이후 평소에 절대 부탁하지 않던 매의 먹이까지 주라고 하니 무슨 꿍꿍이가 있음을 간파하고 응방에 더 머물러 있었는데, 갑자기 주변이 소등되고 어둠 속에 서 왕이 나타났던 것이다.


왕은 또 말했다. 국금이란 왕이 남긴 비밀을 목숨까지 걸고 지키는 사람이라고. 이에 재운은 놀란 눈으로 어둠 속의 용안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비밀스런 하명을 받고 깊은 고민에 빠져 보름 정도 지내던 그에게 단짝 효명이 국금 얘기를 꺼내니 도대체 무슨 예기를 할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중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어성御聲을 대신하고 왕명을 통갈通喝하는 것이었으나, 왕을 지금거리에서 모시는 사람으로서 비상시엔 호위 무사 역할까지 해야만 했다. 이를테면 문과 무를 겸비한 왕의 최측근 호위병인 셈이다.


인정전 앞 마당에 연회가 열렸다. 매년 입춘이면 지방 관리들을 초대했다. 인정전 소속 나인들에겐 곤욕을 치르는 연중행사였다. 이렇게 왕이 대중 앞에 용안을 드러낼 때면 내금위 무사들뿐만 아니라 중금부에서도 비상이 걸린다. 왕의 신변 보호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금위 군교들은 연회장 입장객의 신원을 일일이 파악한 후 들여보낸다. 이대 일부러 말을 걸기도 하는데, 이는 중금들이 목소리를 기억하며 이 음성이 담고 있는 특징을 머리 속에 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실 중금들은 목소리만으로도 대충 위험인물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중금부 소속인 효며와 재운도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말석ㅇ[서 상석으로 이동하며 관찰하던 중 효명은 전혀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 눈짓으로 재운에게 신호를 보냈다. 둘은 함께 발설자를 찾아 나섰지만 실패했다. 왕이 지방 관리들에게 줄 하사품인 도자기를 궁으로 들이는 잡역부들은 초데장을 확인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자객이다’


결국 사건이 발생했다. 악공 한배하와 모리배들이 벌인 짓이었다. 이미 효명의 사전 파악 덕분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기에 이들을 모두 현장에서 체포했다. 추국 끝에 배후자는 끝내 밝히지 못했지만 한배하의 진술은 확보했다. 그는 가족들이 인질로 붙잡혀 살해 위협을 당하고 있어서 이런 짓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왕은 지난 번 사건과 동일한 케이스임을 직감했다. 배후자는 밝혀내지 못한 채 애꿎은 금위군과 나인들만 줄초상을 당하고 말았다. 또 계속 제기되는 연잉군 연루설, 이는 왕을 겁박하려는 노론이나 연잉군을 모함하려는 소론 모두 자신들의 정치적 계산만 두드리는 그런 씁쓸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지금껏 왕의 신변에 위협되는사건들은 음식에 독을 넣은 일, 침전 기둥에 화살이 박힌 일, 이번 발생한 악공의 살수殺手 기용 등이 모두 연잉군과 연루되었다고 조정 대신들이 압박하니 왕으로선 역정이 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판의금부사가 올린 혐의자 명단엔 중금 이재운이 포함되어 있었다. 왕은 뭔가 선명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들이 노린 것은 ..... 국금이다!’


국금 노출이 두려운 왕은 정중금 홍정택을 불러 이재운을 즉결 처분하라고 살생부에 표식을 했다. 사실 재운은 왕의 국금 요청에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궁녀 향안을 자신의 여인으로 삼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런 비화는 왕과 재운 사이의 비밀이었다.


왕의 명을 받은 정중금은 효명을 불러 이 사실을 알리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재운과의 은밀한 만남을 권유했다. 이대로 출중한 벗 재운을 보낼 수가 없다고 판단한 효명은 친구의 사랑을 위해 모사를 꾸민다. 즉 재운의 목을 칠 때 몽두를 씌워서 단칼에 처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재운의 시신이 없고, 중금 효명의 행방도 오리무중이라는 얘기가 떠돌았다.


재운보다 네 살 연상인 내금위 군교 고경찬은 재운이 궁녀 향안을 엿보는 현장을 여러 번 목도했다. 응방내시 고우익의 친자인 그는 휴가를 내어 궁궐 밖에서 활동했다. 그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재운이 전라도 고흥 독골마을로 간 향안을 만날 수 있도록 길잡이에 나섰다.


몸도 성치 않은 재운은 관아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객관에 머물지 않았다. 벌써 산중 모처에서 떠난지 이레가 지나고 있었지만 강한 체력을 보이는 재운에게 고경찬을 혀를 내 둘렀다.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 였다. 재운은 홀로 해안을 따라 남하해 영광에서 나주 쪽으로 방향을 틀어 월출산에 올랐다가 다시 하산해 보성 땅과 고흥을 잇는 지협에 도달했다. 이제 사나흘 정도면 그리운 향안을 만날 수 있으리라.


고흥에 들어선 재운은 부상負商행세를 하며 장을 떠돌며 독골마을을 물어 보았다. 운 좋게 독골 촌로를 만나 물질하는 남원댁 집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거지꼴의 재운은 절뚝거리ㅣ는 ㄱ걸음을 내딛으면서 마침내 남원댁 집 앞에 도착했다.


“계시오!”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인이 마루에 올라섰다. 사방이 어두워 분별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여인은 득달같이 달려 나와 마당에 섰다. 머리를 올린 향안이었다. 이제 효명이 죽엇음을 인지한 재운은 향안은 만나 반가움보다 오히려 절친을 잃은 슬픔에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재운을 향안은 가만히 안았다.


남도의 바닷가 독골마을에서 심마니 이용술로 위장해서 살아가던 재운은 마을 유지와 시비가 붙으면서 신분이 드러날 위기에 처한다. 재운이 궁중 출신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마을 유지는 공을 세울 목적으로 평소 뒷줄을 대던 고위급 환관에게 이를 고발, 곧 의금부 도사와 나장들이 파견된다. 


재운은 국금이 위기에 처했음을 직감하고 여섯 살 난 아들 지견에게 경종으로부터 받은 국금을 전수하고 반드시 궁에 들어가라는 유언을 남긴다. 의금부 관원들과 대치하던 재운은 결국 먼저 간 향안과 효명을 만나러 자결하고, 아들 지견은 자신이 국금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소금 장수의 손에서 자란다.


세월이 흘러 열일곱 살이 된 지견은 한양으로 상경하여 갖가지 인연을 맺으며 아버지를 이어 중금이 되고, 세자 이선과 가까워진다. 그리고 비로소 지견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유지가 경종이 남긴 국금임을 알게 된다. 


지견으로부터 국금을 전해 받은 세자 이선은 왕권을 위협하고 백성을 유린하는 노론 관료들의 횡포로부터 왕권을 지키고 아들인 세손 이산(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계획은 세운 뒤 부왕父王 영조와 거래를 한다.


과연 경종이 전한 국금은 무엇인가?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사도 세자는 어떤 계획을 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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