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
유정호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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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 높아진 건 맞지만 놓쳐버리는 사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이 나라를 위해 순국한 분들을 꼭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이들을 소개한다. 조선 총독을 노린 65세 노인 강우규의 폭탄, 일본 경찰 1천 명과 대적한 조선의 총잡이 김상옥 등의 이야기가 우리를 반긴다. 2부에서는 독립운동에 모든 걸 건 이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헤이그에서 독립을 외치다가 순국한 이준, 을사늑약에 개탄하며 자결로 사죄한 민영환의 이름이 눈에 띈다. 3부에선 독립운동을 이끈 이들이 주를 이룬다. 손병희, 서재필, 김구, 안창호 등 익히 아는 이름이 모여 있다.


4부는 독립운동에 제약 따위는 없다고 외친 이들을 소개한다. 반봉건․반침략의 혁명을 주도한 전봉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친 외국인 베델, 독립운동의 선봉에 선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등의 이야기가 이색적이다. 마지막으로 5부는 잊지 말아야 할 친일파의 이야기다. 김성수, 김동인, 안익태, 민영휘의 동상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 힘들어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인물임을 상기시키엔 충분해 보인다.


강우규, 조선 총독 제거에 나서다


서울역 앞에 동상 하나가 서 있다. 대부분의 행인들은 그저 무심코 이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상의 주변엔 노숙자들이 어슬렁거리고, 그들의 왠지 모를 위압감과 풍겨대는 악취로 인해 행인들은 빨리 지나가고픈 마음일 것이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독립운동가 강우규이다. 소설가 박경리의 장편소설 '토지'에도 그의 실명이 등장한다. 그는 삼일만세운동 이후 최초로 실행한 의거 활동의 장본인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대충 스쳐갈 그런 분이 결코 아니다.


1855년 7월 14일, 그는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빈농貧農의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가 죽어서 시집간 누이의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 먹고 자랐다. 당시 시대상에 따른 고달픈 누이의 시집살이를 예상해 볼 때 아마도 눈칫밥 생활이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어렵게 성장한 그는 형의 권유로 한의술을 익혀 덕천읍에 한약방을 개업, 명의로 소문나며 큰 돈을 벌었다. 성인이 된 그는 1885년 함경남도 흥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잡화상을 열었는데, 정직과 신의로 장사를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멀리서도 고객들이 찾아왔다.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주권을 넘기고 말았다. 나라를 잃어버린 그는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수년 간 간도와 연해주를 돌며 독립운동을 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러 다녔다. 마침내 지린성 요하현을 점찍고 독립운동기지로 삼아 1915년 환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모든 재산을 가지고 이곳으로 이주했다. 바로 신흥동(신흥촌)이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도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선택한 신흥동은 벽지에 불과했으나 얼마 뒤 철도가 연결되면서 북만주 지역을 쉽게 다닐 수 있는 교통 요지이자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는데,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며 1년 만에 100여 호가 넘는 큰 마을로 성장했다.


1919년 삼일운동의 소식이 신흥동에도 들려왔다. 하지만 독립을 원하는 만세 시위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죽었다는 안타까움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일제를 혼내줄 방법을 찾다가 미국제 폭탄과 수류탄을 구매 확보했다.


9월 2일 오후 5시 사이토 총독이 남대문역에 대기하던 환영 인파와 인사를 나누고 마차에 오르는 순간, 강우규는 폭탄을 사이토에게로 던졌다. 그러나 마차에서 4m 떨어진 지점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마차 주변에 있던 서른일곱 명이 죽거나 다쳤지만, 사이토 총독은 무사했다.


강우규는 의거가 실패해서 분했지만, 재차 시도하기 위해 현장에서 급히 피신했다. 한편 일본 경찰은 폭탄을 던진 사람이 노인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범인을 찾다가 사건 발생 16일이 지난 9월 17일에 탐문수사 끝에 결국 강우규를 체포했다. 재판정에서도 얼마나 당당했으면 일제는 그를 '강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선생은 66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죽음으로 사죄한 민영환


민영환의 노력에도 붕구하고 대한제국은 크게 변화되지 못했다. 고종의 무능력과 친일파의 득세와 함께 대외적으로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지지했던 것이다. 마침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이를 무효화하려고 동분서주했지만 그럴수록 그의 입지는 좁아만 갔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고종에게 상소문의 참뜻이 전달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목숨으로 뜻을 전달하기로 결심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2일이 되던 날인 1905년 11월 30일 그는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칼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날카로운 풍자로 일제를 비난한 이상재 선생


나라를 잃은 1910년, 이상재 선생도 환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식민지 현실을 탈피하는 데 앞장을 섰다. 전국 10여 개의 YMCA를 통합, 1913년에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고 미래의 꿈인 청년들의 의식 변화와 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서울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연설할 때는 “때 아닌 개나리꽃이 이리도 많이 피었을까?”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개나리꽃의 의미를 알아채고 큰소리로 박장대소했다. 당시 강연장에는 이상재를 감시하고자 일본 경찰이 많이 있었는데, 이상재는 그들을 ‘개(犬) 같은 나리’라고 비꼬며 풍자했던 것이다.


일제의 침략에 맞선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전파한 박은식 선생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한다”, “국혼國魂은 살아 있다. 나라가 망했어도 국혼만 불멸이면 부활할 수 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멸망하더라도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했으니 나라가 형체라면 역사는 그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정신만 살아 있으면 형체도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등 주옥 같은 명문장을 남긴 박은식 선생(1859~1925년)은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와같은 그의 행적 덕분에 우리 민족은 역사를 기록하고 잊지 않으려 노력한 결과 결국엔 나라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글로 수많은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 몬 소설가 김동인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 김동인(1900~1951년)은 일제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38년 <매일신보>에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찬양하는 글로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내선일체란 '내'인 일본과 '선'인 조선은 한 몸이라는 식민지의 정당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는 일제가 내놓은 민족말살정책이자 일제강점기의 표어였다. 무지렁뱅이라면 몰라도 식자층인 그가 일제의 앞잡이로 활동한 것은 아이로니한 현실이다.


1939년 ‘북지황군 위문작가단’으로 한 달 동안 중국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방문해 위문했다. 김동인이 억지로 참여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북지황군 위문작가단’을 제안했을 뿐 아니라 참여할 친일 문인 작가를 직접 섭외까지 했다. 중국에 가는 비용도 출판사와 문인들이 부담하도록 한 결과, 김동인은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자발적인 친일 행동이므로 분명한 '친일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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