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술 익스프레스 - 와인, 위스키, 사케 못지않은 K-술의 매력
탁재형 지음 / EBS BOOKS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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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내 SNS 프로필에 적혀 있던 타이틀은 ‘제법 성공한 술꾼’이었다. 술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그 제조 과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도 아닌, 그저 술을 사랑하고 술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런 주제에 나라의 큰일에 쓰일 술을 추천하고, 좋은 술이 자웅을 겨루는 자리에서 그 술을 심사하고, 마셔본 술 이야기가 담긴 책으로 여러 사람의 군침을 돌게 만든다면 그것이 ‘성공한 술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애주가의 오지랖으로, 이 글을 썼다. - '시작하는 글' 중에서




우리술의 탄생


알코올 향을 통해 잘 익은 과일을 발견하는 방법에 능숙해진 우리 조상들은 과즙을 함빡 머금은 프루츠 칵테일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과일을 담아두었던 그릇 아래에 고여 있는 미심쩍은 액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세심하게 관찰해보니 매혹적인 향을 풍기는 걸 알게된 후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을 것이다.


일단 이 매력적인 향이 거부감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무리 중에서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 아마도 그 액체에 최초로 손을 댔을 것이 분명하다. 그 사람은 점차 그 오묘한 맛과 향에 빠져 연거푸 손 바가지로 액체를 들이켰을 것이다. 이후 얼굴이 홍조색으로 바뀌면서 점점 말이 많아지고, 웃음이 헤퍼지고, 기분이 엄청 좋아짐을 느끼다가 결국엔 잠에 푹 빠져들어 코를 골았을 것이다.


우리술은 대부분 '곡주穀酒'이다. 뽀얗고 걸쭉한 탁주濁酒, 우아한 향의 맑은 액체인 청주淸酒, 뜨거운 불기운을 담은 소주燒酒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우리술의 구분이 이게 전부는 아니다.


안동소주


예로부터 안동은 소주의 고향이었다. 몽골군이 한반도를 유린하던 시절, 이들이 병참기지로 삼았던 개성, 안동, 제주 등지에서는 증류주 문화가 꽃을 피웠다. 안동은 대대로 사대부의 고장이었다. 집집마다 제사를 비롯해 손님을 치를 일이 많아서 소주는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였다.


소주를 빚는 방법, 즉 제조법은 가문마다 달랐다. 이를 '가양주家釀酒', 즉 집에서 담근 술이란 의미다. 술을 잘 빚기로는 역시 아낙네의 솜씨를 따를 수가 없었다. 안동소주는 안동 반남 박씨 가문의 가양주인데, 현재 '명인안동소주'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박찬관 대표의 할머니도 그런 분 중 한 분이다.


문배술


들큼하고 씁쓸한 희석식 소주가 우리가 오랫동안 마셔오던 것인줄만 알고 지내던 시절에도 문배술의 이름 석 자 정도는 애주가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축구라는 경기를 떠올리면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을 떨쳤던 차범근 이름 석자 정도는 모두 아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문배술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자부심이었다. 심지어 그 이름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술에 담긴 향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도 그러했다.


'문배'가 '야생 배'의 일종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고 문배술이 배로 만든 과실주로 착각하기 쉽겠지만 사실은 곡물인 '수수'와 '조'로 만든 '증류식 소주'이다. 전혀 배가 들어가지 않았지만 문배술에선 상큼한 배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문배술의 고향은 평양이다. 겨울이 길고 땅이 척박해서 논농사가 어려운 북한땅에선 쌀보다 흔한 밭농사 작물인 수수와 조로 술을 담는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문배술의 전통을 잇고 있는 이승용 문배주양조원 실장의 고조모인 박씨 부인이 집안 대소사에 내놓던 소주가 바로 '문배술'이다.


국가무형문화재 '문배주'보유자인 이기춘 명인이 자란 환경은 '누룩 뜨는 냄새와 술 익는 냄새' 속이었지만, 직장은 술과 문관한 대한항공에 입사해 17년간 경영조정실, 회장 비서실 등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직장에서 퇴근한 후 아버지 이경찬 선생의 뜻에 따라 새벽까지 꾸지람을 들으며 문배술을 내리는 기술의 전수가 이어졌다고 한다.


한산 소곡주


소곡주는 "무왕이 신하들과 함께 소곡주를 마셨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소곡주는 누룩을 적게 쓰고 저온장기발효를 거쳐 만든 술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원군을 이끌고 귀국한 왕자 풍이 이끈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망국의 슬픔을 달래고자 당시 주류성에서 여인들이 흰 소복을 입고 술을 빚았는데, 이 술이 소곡주라는 백제역사와 관련된 얘기도 있다.


한산 소곡주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쌀로 빚은 술이라서 사장될 위기가 있었다. 1979년, 고 김영신 할머니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소곡주를 인정받았지만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은 법으로 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산면에서 워낙 소곡주가 유명했기에 잔칫집에 불려다니며 할머니는 술을 빚어주었다고 전한다.


소곡주를 만드는 과정은 맵쌀을 갈아 먼저 백설기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덕을 잘게 부순 뒤 누룩즙을 섞어 삼사일간 발효시켜 밑술을 만들고, 여기에 찹쌀로 고두밥을 지어 덧술을 한다. 이때 메주콩과 말린 구절초를 함께 넣어준다. 메주콩은 술이 쉽게 쉬는 걸 막기 위함이고, 구절초는 특유의 향과 함께 발효시의 잡균을 방지할 목적이다.


우리술에 지역성을 담다


중소 규모의 전통주 양조장들이 생존을 위해, 혹은 전통주의 복원이라는 장인의 열정을 바탕으로 프리미엄급의 우리술을 재창조해 냈다면, 대형 양조장들의 경우엔 시장 점유율의 회복과 확장을 위해 대중의 니즈에 부합하는 새로운 술을 만들어내는 접근을 시도했다. 이런 업체들의 경우엔 매출 규모가 크고 수입 원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전통주 면허를 받지 못하고 일반주류제조면허로 영업을 하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젊은 양조자들이 우리술 관련 창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돈이 된다’는 확신 때문이다. 2017년의 온라인 쇼핑몰 판매 허용이 가장 직접적인 계기였다. 다른 종류의 술들이 모임의 감소와 건강 중시 풍조 속에서 고전을 거듭하고 있을 때, 택배를 통해 문 앞으로 배송되는 시스템과 유통 마진을 뺀 '가격 경쟁력'에 기인한다. 이는 코로나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트렌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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