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 새로운 세상을 꿈꾼 25명의 20세기 한국사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에 등장하는 스물다섯 명의 인물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투옥이나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끝내 지키려 한 삶의 원칙이 있었다. 자유와 평등, 여성 해방과 노동 해방,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등등. 추구했던 목표는 각자 달랐지만, 자신이 삶의 원칙으로 세운 가치들을 실천하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곰곰 돌이켜보면, 모두 공동체의 ‘사랑’과 ‘평화’와 ‘행복’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던진 존재들이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세상에 맞서 싸운 여자들을 소개한다. 한국 최초의 고공투쟁 노동자 강주룡을 비롯해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 그리고 위안부 참상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 등의 이야기가 우리를 반긴다. 2부에서는 최초의 도전을 감행한 자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을 비롯해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던 박열이나 바이러스 퇴치 역사의 전설 이호왕의 이름이 눈에 띈다.


마지막으로 3부에선 시대와 불화한 이들이 주를 이룬다. ‘한국 영화의 개척자’ 나운규, ‘1960년대 문학소녀의 대명사’ 전혜린,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김수근, ‘한국 문학의 찬란한 별’ 김승옥의 이름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바 이들은 명성을 드날렸으나 시대와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수없이 좌절하고 방황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이 책에 소개되는 25인의 20세기 인물들의 삶에서 다소 도움이 되는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국 최초의 고공투쟁 노동자


한국 최초로 '고공농성'을 실행한 사람은 일제강점기의 여성노동자 강주룡(1901~1931)이다. 그녀는 평양 '평원고무공장' 여공이었다. 평양의 상징 대동강 을밀대에 올라 농성하다 끌려 내려와 구속된 후 단식 저항을 하다가 3개월도 안 돼 죽고 말았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휘청거리던 조선고무공업계의 공장주들은 불황 타개책으로 임금 인하를 단행한다. 하루 열다섯 시간 넘게 일해도 고무신 한 켤레 값도 못되는 일당을 받던 노동자들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


1930년 8월 사용자 연합인 '평양고무공업조합'이 기존 임금에서 17% 삭감 조치 방침을 노동자들에게 통보했다. 이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일제 권력과 결탁한 자본가들을 비판하며 반대 투쟁을 일으켰다.


1년 가까이 이어진 투쟁에도 별 성과가 없자,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 여공들은 단체로 단식 파업에 돌입했다. 평양 전체 2,300 여 명의 고무직공들을 대표해 이들이 앞장서서 투쟁을 전개한 셈이었다. 이 파업을 주도했던 강주룡은 일본 경찰의 개입으로 여공 20명과 함께 공장에서 퇴출됐다. 이후 포기를 모르는 그녀는 2층 누각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 농성에 돌입했다.


강주룡의 고공농성과 죽음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노동자의 임금 문제가 무산자無産者 대중의 생존권 문제와 맞닿아 있으며,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여공도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이란 사실을 각인시켰다.


평양과 경성을 비롯한 전 조선의 공업지대에서 궁지에 몰린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단결해 거센 투쟁을 시작했다. 동맹파업, 단식투쟁, 고공농성 등 강도 높은 저항이 이어졌다. 1930년대는 소비 문화가 꽃피는 ‘모던 조선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노동자 무산대중의 생명권과 기본권을 지켜내기 위한 끊임없는 ‘싸움의 시간’이기도 했다.


일본군 전쟁 범죄 피해자의 용기 있는 증언


1991년 8월 14일 김학순(1922~1997년) 할머니는 자신의 위안부 피해 사실을 세계 최초로 공개 증언했다.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절절하고 힘찬 결기가 느껴지는 '사회적 고백'이었다.


김학순의 증언 이후 우리 사회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식민 지배와 전쟁의 참상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사회적 경험으로 남게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김학순 이후 용기를 얻은 많은 위안부 할머니가 저마다 자신의 끔찍한 과거를 증언하기 시작했다. 김학순은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여성 활동가였다.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혁명가


경북 문경 출생인 박열(1902~1974년)은 어릴 적부터 명석해서 소학교를 졸업한 뒤 당대 명문 서울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 진학,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해 10월 그는 일제가 마련한 규율과 질서 하의 교육 과정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 자퇴를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구두닦이, 신문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정부 단체인 '흑도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아나키스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자신의 소울 메이트인 가네코를 만나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열혈 아나키스트로 활약했다.


192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이로 인해 야기된 사회적 모순도 극심한 탓에 이를 해소할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특히,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던 청년들에게는 아나키즘이 세상을 변혁시킬 방안으로 기대를 받았다.


박열과 가네코 커플은 제국주의의 정점에 일본천황이 있다고 판단, 천황을 처단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책이라고 결론내고서 천황 암살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실행했다. 박열은 천황이 기거하는 궁성의 우편배달부로 위장 취업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계획이 발각되어 박열 커플은 일본 사법당국에 긴급 체포되고 말았다.


박열과 가네코는 끝내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이내 둘은 천황이 내린 특별조치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받는다. 박열은 형의 경감 소식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으며, 가네코는 천황의 칙서를 받자마자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일제는 조선인 대역죄인도 감싸 안고 용서해주는 천황의 대범한 풍모를 연출할 의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의 정당치 못한 사법 조치 자체를 무시하겠다는 뜻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한국 여성운동을 이끈 용기 있는 언론인


조성숙(1935~2016년)은 평생 언론인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서울 동숭동에 위치했던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그녀는 <여원>을 발행하던 학원사에 입사했다. 잡지사 기자 생활 중 남편을 만나 결혼, 20대 중반 몇 년을 가정주부로 지내다 196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 <신동아>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그녀는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일했다. 노골적인 검열 속에서도 정권을 비판하는 논설이 몇 차례 나가자 즉각 압박이 들어왔다. 정부가 나서서 광고주들을 윽박질러 광고를 싣지 못하게 만들었다. 바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굴복하지 않는 그녀를 포함한 기자들은 해고조치되고 복직 투쟁을 벌였다. 이후 그녀는 <한겨레> 창간에 참여했다.


병상에서 흐려진 기억을 되살리고 불편해진 손을 움직여, 언론인 생활 40년을 회고했다. 그 기록이 바로 <한겨레와 나>다. 이 책에는 ‘동아투위’ 활동과 한겨레 창간 당시의 상황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설명이 담겼다. 여성 운동가이며 민주 언론인이기도 했던 조성숙 개인의 자랑스럽고 보람된 발자취인 동시에, 한국 언론이 독재와 자본에 맞서 싸우며 성장한 가장 내밀한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한국 영화의 개척자


눈을 희번덕거리는 ‘광인의 낫질’ 씬, 바로 이 한 장면이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됐다. 웃고 있어도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화가 나 있는 건지 미쳐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피지배자의 기이한 모습. 조선인 관객들은 나운규(1902~1937년)의 성난 얼굴을 보며 만세 운동이 좌절된 이후 겪었던 깊은 상실감을 보상받았고, 거칠 것 없이 날로 번성하던 제국 일본의 지배자들은 두려움과 긴장감을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희열’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공포’를 동시에 전달할 수 있는 예술적 능력은 귀하고 드물다.


1960년대 고독한 영혼의 상징


문학 소녀 전혜린(1934~1965년)의 삶을 그 누구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듯이, 그녀의 죽음 역시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불가해의 영역일 뿐이다. 그녀가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과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다만, 그녀의 결단은 한국 사회의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측면들과 결부돼 있기 때문에 사회적이며 대중의 정서를 크게 격발했다는 점에서 문화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녀의 죽음은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 무의식과 남성 지식인 주류 문화가 구축한 세계의 질서에 대한 마지막 저항 혹은 굴복의 한 장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