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상은 과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날씨가 더운 여름철엔 냉면을 자주 찾게된다. 냉면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잘게 부순 얼음을 적당하게 면 위에 올리고, 냉면 육수에 겨자를 약간 풀고, 또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려서 골고루 섞어서 먹는 것이다. 이때 식초는 살균작용을 하므로 여름철 식중독을 방지하는데 효과가 있다. 이 살균작용 때문에 나는 세족洗足할 때도 미지근한 물에 사과식초를 몇방울 떨어뜨린다.
꽃 가꾸기를 좋아하는 나는 계절별로, 색깔별로 꽃을 즐긴다. 빨간 장미꽃, 하얀 백합꽃, 노란 개나리 등처럼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눈에 보이는 색깔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빨주노초파남보'라는 가시광선이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이고 다른 빛은 볼 수가 없다. 나뭇잎은 빨간 파장을 흡수하므로 녹색으로 보이고, 장미는 녹색 파장을 흡수하므로 빨간색으로 보인다. 우리들 눈에 보이는 색은, 실상은 흡수된 색의 보색인 것이다.
나른한 오후엔 커피 한 잔이 댕긴다. 이처럼 우리들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알코올이나 커피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걸까? 커피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커피는 뇌의 신경세포인 뉴런과 작용하기 때문에 중독성이 강하다. 더구나 카페인은 물과도 친하고 기름과도 친한 성질 때문에 세포막을 뚫고 온 몸에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예를 들자면, 음주를 했을 때처럼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거나 이뇨작용을 하는 등 몸에 퍼져있는 아데노신 수용체와 결합하여 다양한 효과를 낸다. 그래서 우리들은 카페인을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들이 이성에 대한 호감으로 사랑에 빠졌을 경우와 같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하다가 달을 보고 놀랐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달은 아름답고 완벽한 신적神的인 존재로 여겼는데 달이 울퉁불퉁한 그 실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 것이다. 마치 성모 마리아가 곰보라고 알게 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를 주장하는 갈릴레오를 가톨릭교회가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리 개미에게 지구가 둥글다고 설명해줘도 2차원에 사는 존재가 다른 차원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인간도 그 나름대로의 한계에 갇혀 있는 탓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합이적인 인간이 가질 태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계는 무한無限하고, 우리 눈에 알고 있는 것은 티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것들은 변하고 순환하고 있다. 이는 불변의 법칙이다. 산도 풍화風化되고, 대륙은 꿈틀거리며, 바다가 사라지고, 푸르던 초원이 사막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처럼 변화야말로 지구라는 행성의 특성이다. 이런 변화 속에도 규칙이 있다. 질량 보존의 법칙 하에 있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 지구에 있던 암석은 화성암이었다. 물컹한 상태의 마그마가 식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들어진 위치에 따라 분출암과 변성암으로 구분되는데, 화산 분출시 지표상에서 굳어진 돌은 분출암이고, 땅 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굳어진 돌은 변성암이다. 변성암에서 보석이나 광물이 많이 발견된다. 마치 부처님이나 깨달은 수행자들이 남기는 '사리'처럼 말이다.
시간이 흘러 바다의 조류, 강물의 흐름, 바람 등의 풍화작용으로 암석은 점차 모래로 변하거나 점토가 된다. 조산 운동이 발생해서 모래의 사암층은 융기하기도 하고 다른 해안으로 실려 가기도 한다. 안면도 해수욕장의 모래알은 먼 과거엔 다른 곳에 있었을 터이고, 미래엔 또 다른 어디론가의 바닷가에 위치할 것이다.
꽃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대체로 홑꽃과 겹꽃이고, 꽃잎의 수는 1장(나팔꽃)에서부터 많게는 89장(다알리아)이다. 꽃잎들은 '피보나치의 수열'을 따른다. 1, 1, 1+1=2, 1+2=3, 2+3=5, 3+5=8, 5+8=13, 8+13=21, 13+21=34, 21+34=55, 34+55=89, 55+89=144 ... 이런 식으로 꽃잎의 수가 늘어난다. 이것이야말로 수數들의 향연이다. 수는 각자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우주는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져 있으며, 상징들은 삼각형, 원, 그밖에 여러 기하학적 도형들이다." - 갈릴레오, <Assayer>(1623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