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에선 <관상>과 <왕의 남자>가 소개된다. 영화 <관상>은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유명 대사를 남기기도 했는데, 한 관상가의 삶을 통해 조선 왕실의 비극적 역사 중 하나인 계유정난이 소재가 되었다. 영화 속 관상가는 역사의 실존인물인 맹인 점술가 지화를 모티브로 창조된 인물이다. 지화는 태종, 세종, 그리고 단종을 섬긴 점술가였다.
5장에선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대립군>이라는 영화로 광해군을 소재로 다룬다. 특히,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상상력이 가미된 가상의 역사가 등장한다. 영화이므로 이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의 도플갱어가 나타나 벌어지는 일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결코 아니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다 상상력 내지는 가정법을 도입하면 흥미로운 역사로 탄생할 수 있다.
이밖에도 책엔 <쌍화점>, <명량>, <남한산성>, <명당>, <군함도> 등이 소개된다. 영화 제작의 기본 출발점은 '만약에'이다. 기존 책에 없는 이러한 다양한 테마가 영화 속의 역사를 바라보는 창의적인 생각인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당대의 주류의 해석에 편승하는 것이 무난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음을 전하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이 중 영화 <관상>의 인상적인 장면을 소개하면서 서평에 갈음하려고 한다.
관상을 잘 본다고 소문난 김내경(송강호), 그는 몰락한 양반이다.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한양의 유명 기생 연홍(김혜수)이 산골벽지까지 찾아와 돈벌이를 같이 해보자고 동업을 제안한다. 당시의 권력가는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던 좌의정 김종서(백윤식)였는데, 그는 수양대군(이정재)의 야심을 간파하고 문종에게 김내경을 소개, 수양의 관상을 보도록 한다.
하지만, 김내경은 이미 한명회와 수양대군의 계략에 빠져 수양대군을 야심이 전혀 없는 인물로 문종에 보고한다. 이 오판은 조선 역사에 계유정난이라는 성공적인 쿠데타를 초래하고 만다. 만약 김내경이 수양대군의 회유에 빠지지 않고 관상을 제대로 보고했다면 역사의 흐름은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단종실록에 따르면, 맹인 점술가 지화는 왕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 예언함으로써 세인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화는 안평대군을 왕으로 지목했으며, 실제로 안평대군의 세력이 날로 커져 갔다고 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가 바로 수양대군이었으니 안평과 수양의 대립은 극심했다. 영화에는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갈등구조로 그리고 있지만, 실제론 안평과 수양의 갈등이 더욱 심했던 것이다.
세종대왕의 자손
(부인 6명에 18남 4녀. 정실인 소현왕후는 8남을 낳았다)
첫째, 문종(5대 왕)
둘째, 수양대군(7대 세조)~ 무예, 천문, 수학, 음악, 풍수 점 등에 탁월
셋째, 안평대군~ 서예, 시문, 그림에 능했다. 조선 4대 명필 중 한 명.
문신임에도 세종의 명을 받들어 조선의 북방에 4군과 6진을 개척한 김종서의 관상을 보고 김내경은 '호랑이'상이라고 평했다. 그런데 김종서는 실제 호랑이 관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저 체격부터가 왜소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종서를 세종은 "유학을 익힌 신하로서 몸집이 작고, 관리로서의 재주는 넉넉하나 무예는 모자라니 장수로서 마땅한 체격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다만 그의 뛰어난 업무 수행 능력과 불굴의 정신을 높이 사서 6진의 적임자로 내세운 것이다.
김종서의 외모가 비록 호랑이 관상은 아니었지만, 그의 삶은 호랑이 관상이었다. 타협을 모르는 원칙주의자였다. 세종의 장자인 문종은 이른바 엄친아로 문무를 겸비한 왕이었지만 몸이 좋지 않았기에 39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랬기에 동생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왕위에 대한 욕심을 가졌을 법하다. 그리고 이를 모를 문종이 아니었기에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를 고명대신으로 삼아 어린 아들 단종의 보필을 당부했던 것이다.
영화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실제로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했다면 원칙주의자인 그가 마땅히 수양대군을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종서는 자신의 눈으로 수양대군을 평가했던 탓에 마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경우와 같은 그런 불행을 초래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김종서의 판단 오류는 조선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기록된 역사는 수양대군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던 김종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승리자의 역사 때문일까? 어쩌면 계유정난과 단종의 역사는 수양대군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편집되고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즉 계유정난은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이 모의하여 단종을 축출하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이 일으킨 것이라는 그럴 듯해 보이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후대의 사학자들은 수양대군이 주도한 정치적 쿠데타였다고 평가한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시선으로 바라본 바로도 영화 속 장면에서 수양대군이 자신의 오랜 소원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음을 보여준다.
역사에 가정법은 소용이 없다
만약 왕자의 난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당초 조선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은 왕권정치가 아닌 신권정치를 꿈꾸었다. 이방원을 지나치게 경계하면서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왕자와 신하들이 가진 사병 폐지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불안감을 느낀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만다. 이로써 왕권이 강화되는 국면으로 전환되고 말았고, 왕의 재능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결정되는 그런 조선의 역사에 우리들은 분통을 터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