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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시옷들 - 사랑, 삶 그리고 시 ㅣ 날마다 인문학 1
조이스 박 지음 / 포르체 / 2020년 3월
평점 :
혼란한 말과 글의 밀림이 일상을 지배할 때, 나는 시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시옷들을 꺼낸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고전과 현대의 명시들을 다시 읽으며 나는 사랑으로,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로 빚어진 책은 사랑과 존재와 삶의 이유가 어디에 잇는지 알려주는 이정표이므로, 내가 그러했듯 그대들도 말과 글의 밀림 속에서 사람을, 사랑을, 나아가 삶을 캐며 서서히 그 길을 걸으시길 바란다. - '들어가며' 중에서
시 속에서 찾은 통찰
책의 저자 조이스박은 서강대학교 및 동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석사까지 전공한 후, 영국 UNIVERSITY OF MANCHESTER의 CELSE(교육대학원)에서 TESOL을 전공,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TESOL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대학에서 교양영어를, 다른 교육기관에서 영어 교수법과 영문학을 가르치고, 기업체에서 다양성 강연을 하고 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이 바뀌어야 하고, 사람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문학과 종교밖에 없다고 믿으며 삶을 허위허위 노 저어 가고 있다. 책벌레로 살다 보니 세상을 거대한 텍스트로 읽어내려 하고 삶을 개인이 쓰는 서사라고 착각하는 치명적인 결점을 기꺼운 마음으로 지니고 산다.
지은 책으로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과 <하루 10분 명문낭독 영어 스피킹 100>을 비롯한 십여 권의 영어학습서와 영어 동화 시리즈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그렇게 이 자리에 섰습니다>와 <로버랜덤>을 비롯해 십여 권이 있다. 책은 총 3부에 걸쳐 30편의 명시를 소개하면서 관련 시의 해석과 함께 해당 시에서 건져올린 통찰을 이야기한다.
책은 미국 시인 사라 티즈데일(1884~1933년)의 시 '혼자'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 시의 해석에 있어서 단순히 '혼자 있다'와 '외롭다'는 것은 다름을 이야기한다. 이 시의 화자는 이미 사랑을 하고 있으므로 절대 혼자가 아님에도 외로움을 호소한다. 그러면서 외롭지 않은 사람은 죽어서 안식을 택한 자일뿐이라고 말한다.
난 혼자예요, 지친 회색 세계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것처럼 내 주변엔 눈보라만 몰아치고
내 머리 위에 끝도 없는 우주가 펼쳐져 있어요.
화자話者가 느끼는 외로움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不在'에서 오는 게 아니다. 다른 종류의 외로움이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면서 살아가지만 인간은 언제나 홀로인 것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는 그런 감정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를 "지친 회색 세계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다음은 영국 시인 엘리자베스 제닝스(1926~2001년)의 시 '뒤늦게 오나니'를 살펴본다. 빛나는 별이 하늘에 한가득 보이던 시절, 사람들은 사랑도 운도 별을 보며 점쳤다. 하늘을 가르는 수많은 별을 보며 어쩌면 그것이 운명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다. 많은 별들 속에 수많은 별똥별.
서양에는 X자로 하늘을 긋는 두 개의 별똥별을 연인이 보면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통상 비극적인 사랑을 "Star-crossed love"라고 부르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속 두 연인을 '별들이 어긋난 연인'이라고 일컫는다.
내게 쏟아지는 별들의 광채는
몇 해 전에 빛나던 빛. 지금 저 위에서
반짝이는 별빛은 내 눈으로는 결코 보지 못한 빛
그렇게 시간의 간극은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나를 애태워
우리는 별이 수백만 년 전에 시작된 빛이라는 것을 안다. 수백 광년을 달려와 별빛이 우리 눈에 닿는 그 시점엔 그 별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시인은 별빛이 우리의 눈에 와 닿는 거리를 마음의 거리로 가늠한다. 누군가가 사랑으로 보낸 마음 하나가 타인에게 닿지 못하는 아득함, 상대방에게 보낸 마음이 닿지도 않거나 변할 수도 있음을 안다.
엘리자베스 비숍(1911~1979년)은 미국의 시인이자 단편소설 작가이다. 1956년 퓰리처상 수상자인 그녀는 20세기 가장 순수한 재능을 지닌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병약한 탓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바사르대학교를 다녔고 재학 중 시인 마리앤 무어를 만나 평생 우정을 이어갔다.
한 가지 기술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많은 것들이 잃어버리겠다는 의도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니
그것들을 잃는다 하여 재앙은 아니죠.
매일 뭔가를 잃어버려 봐요. 열쇠를 잃어버리거나
시간을 허비해도 그 낭패감을 그냥 받아들여요.
잃어버리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리고 더 많이, 더 빨리 잃어버리길 연습하는 거예요
장소, 이름, 여행하려 했던 곳.
이것들을 잃어버린다고 재앙이 닥치지는 않아요.
(중략)
심지어는 당신을 잃는 것도(그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내가 사랑하는 몸짓)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요.
잃어버리는 기술은 터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재앙처럼 보일 수 있을지는(써 두세요!) 몰라도요.
삶에는 여러 가지 기술이 있다. 친구를 사귀는 법, 좋은 부모가 되는 법,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법, 공부를 잘하는 법 등등. 공연하게 따르면 좋은 법칙들은 모두 무언가를 얻거나 성공하는 방향에 있다. 우리는 '실패하는 법'을 말하지 않는 것처럼 '잃어버리는 법'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노력해서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하려다가 못하면 실패하는 것이고, 무언가를 얻으려다 안 되면 잃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이스틀린 커밍스(1894~1962년)는 미국의 시인이자 화가, 희곡작가이다. 그는 약 2,900편의 시와 4편의 희곡과 다수의 에세이를 남겼다. 20세기 미국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기존의 특에 박힌 형식에서 벗어난 현대시 양식을 개척했고, 대문자와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은 시로 유명하다.
커밍스는 대문자 쓰기를 거부한 시인이다. 심지어 'i'조차 대문자로 쓰지 않는다. 그는 I(나)를 세상에 들이밀 때 생기는 자아의 거대함을 참지 못하는 시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시 '감정이 먼저'에는 대문자가 쓰였다! 하나는 Spring(봄)이고 다른 하나는 Don't cry(울지 말아요)의 Don't이다. 아래 사진을 참조하라. 계절이 우리 삶에 미치는 큰 영향을 문자로 형상화한 셈이다.
찰스 부코스키(1920~1994년)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우편배달부,피클 공장 노동자 등의 직업을 전전했고, 자신의 시에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하류 계층의 삶을 담았다. 그리고 그는 비주류 문학잡지에만 자신의 시를 기고했다. 반사회적 성향 때문에 FBI 사찰 대상이 되기도 햇으며, 그의 삶은 <술고래>(1987년)로 영화화되었다.
내 심장 속에는
나오고 싶어 하는 파랑새가 한 마리 있어
하지만 난 그러기엔 강한 남자라
그렇게 말하지,
거기 있어, 아무도 너를 못 보게 할 거야.
부코스키의 시는 굉장히 마초적이다. 그의 시엔 자신이 사랑항 여성과 잠자리를 가진 후 그 여성의 민낯을 하나하나 누설하는 글이 즐비하다. 또한 그는 믿을 수 없을 없는 나쁜 남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중 한국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이다. 아마도 그의 진짜 표현은 '개'가 아닌 '개새끼'였을 것이다. '천박함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지극히 우악스러운 부코스키의 시를 읽다가, <파랑새>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대놓고 얘기하는 시를 만나면 그에 대한 연민이 일어난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내보일 수 없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그것은 '패퇴감'이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는 있으나 어쩔 도리가 없을 때, 입안이 까슬해지며 느껴지는 감정 말이다. 서양에서는 왜곡된 남성성(masculinity)에 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또한 이 왜곡된 남성성을 치명적인 남성성 'toxic masculinity'이라 부르기도 한다. '남자답다'는 문화적 가치가 강요되면 될수록 그들 역시 '남성성'이란 독에 빠져 괴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왜곡된 남성성의 문제는 때로 그들이 자신의 연약함(vulnerability)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집약되어 드러난다.
영화 <술고래>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