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에서 왔니 - 한국인 이야기 - 탄생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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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골백번 변해도 한국인에게는 꼬부랑 고개, 아리랑 고개 같은 이야기의 피가 가슴속에 흐르는 이유입니다. 천하루 밤을 지새우면 아라비아의 밤과 그 많던 이야기는 언젠가 끝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꼬부랑 할머니의 열두 고개는 끝이 없습니다. 밤마다 이불을 펴고 덮어주듯이 아이들의 잠자리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것입니다. 그것은 망각이며 시작입니다.  - '이야기 속으로' 중에서

 

 

한국인 이야기, 꼬부랑 열두 고개

 

이 책의 저자 이어령1934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등장한 그는,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한 전후 세대의 이론적 기수가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1972년부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을 때까지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우리 시대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중앙일보 상임 고문 및 (재)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석좌교수이다. 그는 1980년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일본 동경대학에서 연구했으며, 1989년에는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디지로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지성의 오솔길>,  <오늘을 사는 세대>, <차 한 잔의 사상> 등과 평론집 <저항의 문학>, <전후문학의 새물결>,  <통금시대의 문학>, <젊음의 탄생>, <이어령의 80초 생각 나누기>등이 있다.

 

 

 

 

아라비아에는 '천일야화千日夜話'가 있다. 천일 밤 동안 왕을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려 못한다면 불행하게도 화자는 죽임을 당한다. 심지어 재미 없다고 왕이 더 이상 듣기를 거부해도 죽어야 한다. 여기에서의 이야기는 바로 목숨이다. 이야기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다면 목숨도 끝이 나고 말기 때문에.

 

한국의 밤에도 이야기는 있었다. 그렇다. 어린 시절 들었던 꼬부랑 할머니의 이야기를 말한다.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더 해 달라고 조른다. 그런데, 할머니는 어젯밤에 했던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한다. 내가 어린 시절 한여름 밤에 들었던 수박장수의 수박은 리어카에서 추락, 아직도 고갯길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이제 세상은 변했다.  꼬부랑 할머니를 볼 수 없다. 그 옛날의 '꼬부랑 길'은 이미 수많은 차량들이 휙휙 달리는 자동찻길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도 끝난 것이 아닐까? 아니다. 바위 고개 꼬부랑 언덕을 넘어가는 이야기는 지금도 들을 수 잇다. 왜냐하면, 누구나 나이가 들면 어렸을 때 들었던 그 이야기를 손자손녀에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태명 고개~ 생명의 문을 여는 암호

배내 고개~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출산 고개~ 이 황홀한 고통

삼신 고개~ 생명의 손도장을 찍은 여신  

기저귀 고개~ 하나의 천이 만들어 낸 두 문명

어부바 고개~ 업고 업히는 세상 이야기

옹알이 고개~ 배냇말을 하는 우주인

돌잡이 고개~ 돌잡이는 꿈잡이

세 살 고개~  공자님의 삼 년 이야기

나들이 고개~ 집을 나가야 크는 아이

호미 고개~ 호미나 도끼냐 어디로 가나

이야기 고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는 한국 독자들에게 많이 사랑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엔 한국인 이야기는 없었다. 이에 대한민국의 이야기꾼 이어령 명예교수는 2009넌 4월 6일부터 총 50회에 걸쳐 중아일보에 '한국인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후 신문 연재와 TV 강연을 통해 이어간 작업이 결실을 맺어 총 12권의 책을 기획한 바 있다. 이 책 <너 어디에서 왔니>는 제1권이다.

 

모태의 세계를 향해 청진기처럼 귀를 대면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폭포수 같은 소리, 미세한 혈관을 타고 힘차게 흐르는 배내 아이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한때 우리가 자궁벽에 붙어 발아하던 최초의 땅, 신열 같은 생명 기억이 깨어난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옛이야기가, 그리고 아직 쓰여지지 않은 미래의 동화와 대서사시가 열릴 것이다. - '태명 고개' 중에서

열두 고개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인간, 한국인의 생애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즉 어머니의 임신에 의한 태아로부터 시작하여 출산 후 기저귀를 찬 채 걷기 시작하고 포대기에 쌓여 업히기도 하면서 성장하다가 어느새 돌잔치를 맞이한다. 돌잡이를 통해 장래를 미리 점쳐보는 그런 생애 사이클이 연속됨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이야기 열두 고개에는 한국인의 문화가 담겨 있다. 너와 나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곡신불사,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결코 죽지 않고 살아온 이 신을 노자는 '현빈'이라고 불렀다. 현빈玄牝의 현玄은 신비한 것, 우리가 잘 모르는 신비한 것, 그리고 빈牝은 암수라고 할 때의 그 암이니, 현빈의 문門은 여성의 생식, 만물을 낳는 어머니의 자궁인 것이다. 그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미미하지만 절대로 끊기지 않는 것처럼 골짜기를 돌아 꼬불꼬불 이어지는 고갯길도 그렇게 이어질 것이다. 거기에서 많은 이야기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도덕경>에서 말하는 '곡신불사 谷神不死'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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