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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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80년의 서울과 현재의 뉴욕까지 시공간을 교차하며 첫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애절하면서도 풋풋한 마음과, 온갖 세상 경험과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장년의 고단함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 따스한 에메랄드 빛 서해바다와 시간이 박제된 자연사박물관과 9/11 메모리얼 파크 등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상징하는 듯한 독특한 배경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체험을 선사한다.

 

 

사랑의 에너지를 다시 지피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영원으로부터 영원토록 부조리했다. 분노가 치밀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부조리에, 폭력과 음모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내 자리에서 모스 부호를 타전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여기서 내 마음을 다해 보내는 위로와 사랑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우주의 한 비밀을" - '작가의 말' 중에서

 

등장인물 소개

이미호
안식년을 맞은 독문과 교수로, 미국 뉴저지에 사는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뉴욕에 들러 40년 만에 연락이 닿은 첫사랑 요셉과 재회한다. 스무 살, 아버지의 고문과 강제 해직으로 집안이 기울 무렵 요섭의 고백에 돌아서고, 유학시절에 만난 남편과도 이혼하면서 자신에게 가까운 남자들을 불신하며 살아간다.

요셉
미호의 첫사랑이자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체의 경영자이다. 신학생 시절 미호를 사랑했지만 어머니의 반대와 미호의 거절로 크게 마음에 상처를 받고 갑작스레 결혼해 미국으로 떠난다. 40년 만에 만나는 미호를 위해 관광 가이드처럼 상세한 일정을 잡아 그녀를 의아하게 만든다.

어머니
철저한 외모 관리로 노년에도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미호의 엄마는 대학 교수이던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고문으로 몸져눕는 현실에서 무심하게 도망치며 가족들을 돌보지 않아 자식들에게 상처를 준다.

여동생
요셉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온 여동생은 40년 전 미호를 좋아하고 따르던 중학생이었지만 신학생인 오빠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곤 했다. 두 사람과 함께 뉴욕에서 재회하며 둘 사이의 풀지 못한 기억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미호는 우연히 마이애미를 가게 되었다. 재직 중인 대학의 영문과 선생들이 헤밍웨이 심포지엄에 참석하는 여행 스케줄을 마련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사람이 불참하게 됨에 따라 그 자리를 특별 할인가로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고 합류를 결정했다. 특히, 마이애미와 키웨스트까지만 동행하면 일행들은 거기서 쿠바로 떠나기에 이후는 자유여행을 즐길 수 있어서 미국에 살고 계신 어머니를 오랫만에 만날 작정이었다.

 

그녀는 합류가 결정되던 날 오후 현재 뉴욕에 살고 있는 한 사람에게 급히 연락했다. 만날 수 있다면 40년 만에 만나는 사람이다. 사실 뉴욕 여행이 처음인 것도 아니지만 5년 만에 어머니가 계신 뉴저지의 동생 집에 들릴 계획이라 이참에 그 사람을 볼 수 있을까란 생각에 보낸 연락이었는데 바로 답신이 도착했다.

 

"저녁 식사도 좋고 가능하다면 하루 내내 뉴욕을 보여주고 싶은데.... "  

 

40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분명 있었다. 당시의 인생은 그녀에게 운명의 다트를 던지라고 강요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것들을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애써 기억하고 있었다기보다는 마치 어린 시절 친구네 집 풍경들처럼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들은 그녀에게 수동태로 머물고 있었다. 가끔은 그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애썼던 적도 있었지만 그 기억들은 그녀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살아 있는 동안 한 번쯤은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라고 말이다. 그 사람은 그녀에게 그런 의미였다.

 

미호는 대학에서 독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뉴욕을 향하는 비행기 창 아래로 마이애미 해변이 보인다. 어제밤에 포도주를 마사다가 그녀는 일행들과 떨어져 먼저 방으로 돌아왔다. 바로 잠자리에 들지 목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얇은 시집을 펼쳤다. 나희덕의 시였다. 무언가가 가슴 한구석을 톡하고 치며 지나갔다.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 '어떤 나무의 말' -

 

뉴욕 자연사박물관 로비엔 거대한 공룡이 뼈만 남은 채 서 있었다. 로비에 가득 찬 사람들의 노랗고 갈색이고 검은 다양한 머리칼과 어깨 그리고 상반신 들 사이로, 마치 거센 푹풍우 속에서 언뜻 보이던 별처럼 누군가의 시선이 빛나고 있었고 그녀가 시선을 들자 두 눈은 정확히 마주쳤다. 그녀는 그것이 그 사람임을 알았다. 약하게 감전된 것 같은 통증이 뒤통수를 지나 등뼈를 타고 쭉 내려갔고 얼마간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40년이라는 그 세월이 그를 머뭇거리게 한 듯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9/11 메모리얼 파크로 가는 길에 폭풍이 불고 있었다. 앞으로 전진하지 못할 만큼 거센 바람이었다. 그 사람은 머리를 약간 숙이고 걸으며 따라오고 있는 그녀를 가끔씩 돌아보았다. "아우, 못 걷겠어요. 뭐 이런 심한 바람이 다 있어요", 그녀의 소리에 그 사람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건물 모퉁이를 돌자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쌍둥이 빌딩이 있었을 그 자리엔 폭포가 펼쳐졌다. 이를 설계한 건축가가 명명한 이름은 <부재에의 반추>이다. 즉 '빈 자리를 비춘다'는 뜻이다. 이 물은 죽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눈물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있다.  두 사람은 입장권을 사서 메모리얼 파크로 들어섰다. 거대한 벽 하나에 온통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버질)의 시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그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커다란 모니터에는 쌍둥이 빌딩에 여객기들이 충돌하는 테러 화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당시의 끔찍했던 먼지 투성이의 광경을 설명해주었다. 그는 이제 코리언 아메리칸임이 느껴졌다. 부서진 소방차와 구부러지고 휘어진 철근들, 둘은 지하세계의 여기저기를 걸었다. 잠시 쉬는데 그가 물을 두 병 사왔다. 그는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날 너랑 나랑 둘이 먼 바다로 나갔었잖아."

"무슨 먼 바다요? 저는 깊은 물에서 헤엄 못 쳐요."

"나갔어. 나랑 둘이."

그가 잠시 바람이 빠지는 듯 웃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니 더 이상은 설명하기 싫다는 듯 단호하고 가볍게 말했다. 문득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더 우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몽유도. 죽음의 기록으로 가득 찬 이 지하공간에서 그는 왜 갑자기 그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호명하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그렇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울 수 없는 사랑의 기억이 존재한다. 사랑은 바로 그 시간과 죽음마저 이기는 힘을 발휘하곤 한다. 미호가 40년 만에 요셉과 해후하는 시간은 그녀를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의 순간으로 데려간다. 평생 간직했던 요셉에 대한 미안함과 고통 속에 죽어갔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 피투성이가 되도록 아파했던 자신의 젊은 날과 재회한다.

 

사랑했지만 한없이 서투르고 연약했던, 그래서 도망치고 상처 주었던 이들을 용서하고 화해한다. 그 과정을 통해 마침내 미호와 요셉은 각자의 삶의 절정마저 지우고 살게 했던, 서로 진정으로 신뢰하고 사랑했던 그 마지막 기억의 퍼즐을 맞추어간다. 기억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자 풍경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렷다. 그들은 사랑했으므로 과거만이 중요했다. 미래는 그때도 지금도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소설은 미호가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맑은 맨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날시가 춥죠? 하고 말하는 것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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