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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치 - 전민식 장편소설
전민식 지음 / 마시멜로 / 2019년 8월
평점 :
나의 나라는 내게 한마디 위로의 말도 건네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라는 내게 내가 가진 걸 잃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조차 내가 잃은 것들에 대해,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의 땅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눈에 훤히 보이는 작은 섬이지만 독도는 조선의 땅이며, 독도 역시 조선에게는 애틋한 자식일 터였다. 자식에게 바라는 바 없지만 무한정 사랑을 쏟아 붓는 게 어미의 도리이듯, 나 역시 나의 애틋함으로 독도를 우리의 섬이라고 끝까지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 '본문' 중에서
독도를 지킨 안용복, 그는 누구인가?
책의 저자 전민식은 1965년 겨울, 부산에서 태어나 평택에서 자랐다. 서른을 앞둔 마지막 해에 추계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고, 6년 만에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오로지 글쓰기에만 매진했고, 20년 넘게 한길만 고집한 끝에 마흔일곱이라는 중년의 나이에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2012년 제8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꾸준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작품으로는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13월>, <불의 기억>, <알 수도 있는 사람>, <9일의 묘> 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강의를 하며 파주에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독도는 누구 땅?",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유아원생조차도 "우리 땅"이라고 즉답을 한다. 이토록 대한민국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독도, 동해 먼 바다에 자리잡은 이 작은 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땅이건만 일제 치하의 식민지로 전락해 치욕의 역사를 보낸 것도 억울한 데, 왜 지금도 마치 자기의 땅을 우리 대한민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양 일본은 억지를 펴고 있는 걸까?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다. 조선 왕조가 미처 관리를 다하지 못함에 따라 평범한 조선인의 신분으로서 이웃 일본의 어부들이 불법으로 조업하는 행위를 준엄하게 꾸짖고자 몸소 일본으로 가서 공식적으로 이를 따진 열혈 남아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안용복, 우리의 역사책에도 거의 다루지 않을 정도로 몇 줄만의 남겨진 기록을 근거로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이를 소설로 탄생시켰다.
이토록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그의 여생이 해피 엔딩이어야 당연함에도 그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무사히 귀국해선 조정으로부터 오히려 벌을 받았다. 즉 조선의 독도 지배권을 확인시킨 문서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져는 있으나, 일본과 담판을 짓고 돌아와 국법을 어긴 죄로 귀양을 간 후, 그가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조선 숙종 때 안용복이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 일본에 건너가 에도 막부에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한 일로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번졌던 '안용복 1차, 2차 도해渡海사건'을 긴박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는데, 실존 인물 안용복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영화 시나리오와 함께 소설로도 탄생되었다. 소설은 안용복이라는 한 인물의 고뇌와 내면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 땅에서 오히려 도둑 취급 당하다
때는 1693년 4월, 경제적인 문제로 부산 초량에서 울릉도(독도)로 흘러들어온 안용복 일행은 수백 마리의 강치 무리가 해변으로 몰려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어서 화승총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왔다. 사실 지금 울릉도와 독도는 나라에서 도해금지령을 발령했기에 발각되면 곤욕을 치를 게 분명하므로 우선 몸을 숨기는 게 급선무였다. 멀리 시야에 들어온 배는 일본의 군선인 세키부네였다.
몽돌 해안가는 강치의 울음과 고통 소리가 회오리쳤다. 강치의 피 냄새는 어둠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강치들의 울음소리가 빠져나간 허공을 일본 어부들의 웃음소리가 채웠다.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렸다. 쪽바리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자비한 인간 백정이나 다름 없었다. 생선을 절여 운반하는 포작선까지 보였다.
임시 숙소로 정한 우데기집에 돌아와 모두 잠을 깨웠다. 지금 눈 앞에 벌어지는 일본 어부의 행위는 분명 불법이지만 자신들의 처지가 이를 관아에 보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철수가 현명하다고 판단, 말리던 오징어와 짐을 챙겼다. 그런데, 훈도시만 몸에 걸친 채 쇠갈고리와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일본 어부들이 우데기집을 덮쳤다.
"이놈들 독도에서 도망 쳐봐야 울릉도지. 여기 있을 줄 알았다!"
인적이 드물어 풍성해진 수산물이 안용복 일행의 경제적 애로를 해결해주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입도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울릉도(독도)까지 먼 바닷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관리들에게 체포된 것도 아니고 안용복 일행들은 철천지 원수 같은 일본 어부들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나라는 안용복에게 한마디 위로의 말도 건네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라는 내게 내가 가진 걸 잃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눈에 훤히 보이는 작은 섬이지만 독도는 조선의 땅이며, 독도 역시 조선에게는 애틋한 자식일 터였다. 독도를 우리의 섬이라고 끝까지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조선이 그에게 어떤 미래의 약속도 해주지 않겠지만 이 섬은 자신의 피와 같다는 걸 일본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 백과사전에 따르면 안용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 하던 중 이곳을 침입한 일본 어민을 힐책하다가 일본으로 잡혀갔다. 일본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강력히 주장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이를 가지고 돌아오던 중 쓰시마(대마도) 도주에게 빼앗기는 바람에 그 내용이 죽도竹島가 일본땅이므로 고기잡는 것을 금지시켜 달라고 위조되어 조선에 들어왔다.
이에 조선에선 울릉도는 조선의 땅임이 명백함을 밝히고 1694년 일본의 무례함을 힐책하는 예조의 서계를 전달했다. 이후 안용복은 1696년(숙종 22) 박어둔朴於屯과 다시 울릉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송도(松島:독도)까지 추격하여 정박시킨 후 조선의 바다에 침범해 들어와 고기를 잡은 사실을 문책한 다음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고 자칭하고, 일본 호키주에 가서 번주藩主에게 범경犯境을 항의,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이듬해 일본 막부幕府는 쓰시마 도주를 통하여 공식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일본의 출어금지를 통보해 왔다. 안용복은 나라의 허락없이 외국을 출입하여 국제문제를 야기했다는 이유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었으나 지사 신여철申汝哲 등이 '나라에서 하지 못한 일을 그가 능히 하였으니 죄과와 공과가 서로 비슷하다'고 하여 귀양에 처해졌다.
애초에 조선은 안용복에게 중요한 세상은 아니었다. 양반도, 선비도 아닌 평범한 양인이나 천민들에겐 적어도 그러했을 것이다. 안용복 일행에게 중요한 건 바다였고, 삶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중요하게 다가왔던 건, 초량 왜관에서 일본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면서부터였다. 그때부터 그의 조선이 밉기도 했지만 애틋하기도 했다.
"너는 조선 사람이니까. 너는 조선의 흙이고 숨이며 물이니까. 본래 나라를 지키는 사람은 미천하고 평범한 사람이니까. 참고 숨죽이고 살아온 건, 오늘을 위해서인지도 모른다"(281쪽)
그는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 재차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안용복 일행은 배를 타고 독도를 거쳐 울릉도로 들어갔다. 거의 다섯 달 동안 울릉도와 독도의 감세장이었다. 그리고 지금 쇼군의 서계를 받아 돌아왔다. 서계를 꺼내 살펴보았다. 서계 모퉁이가 피에 젖었을 뿐 글자는 살아 있었다. 비록 공은 세웠지만 관직을 사칭하면서 나라의 법을 어기고 울릉도와 독도에 입도했던 일에 대한 처벌을 피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천박하고 평범한 사람도 나라의 땅과 바다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도해금지령을 어긴 죄와 관직을 사칭한 죄를 물어, 어떤 형벌을 주더라도 감수할 작정이었다. 이는 조선을 떠날 때부터 무사히 살아서 귀국한다면 그리 하겠다고 다짐한 바 있었다.
"네게 조선이 무엇이더냐?"
그는 지금 근정전 앞으로 끌어나온 죄인이었다. 가슴 속에 쌓인 말들이 많았지만 임금의 말을 듣는 순간, 울릉도 탐사 차 그곳으로 들어갔던 광경이 떠올랐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해는 중천에 떠서 오롯이 솟은 울릉도를 쓰다듬고 있었다. 햇살은 멀리 보이는 독도도 그러안고 있었다.
"……제게 조선은 태양입니더. 우리 땅이 어느 곳에 있든, 우리가 어디에 있든 시기와 질투도 없이 공편함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빛을 나누어주는 태양입니더"(364쪽)
이제 안용복의 미래는 임금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될 참이었다. 임금은 안용복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일본인의 기를 꺾고 몸소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인의 왕래를 막고자 한 것은 큰 공임을 들어서 극형을 감하고, 그를 "멀리 유배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다. 안용복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핏덩이가 한순간에 풀어져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런 안용복을 추모한 조선의 대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 이런 글을 남겼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