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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로스트 타임 - 지연된 정의, 사라진 시간을 되찾기 위한 36개의 스포트라이트
이규연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평점 :
내세울 만한 취재 성과는 적고 로스트 타임을 대면한 기록이 훨씬 많다. 항상 한발 늦고, 뒤늦게 분노한다. 그렇더라도 무력감만을 느끼지는 않는다. 비록 늦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로스트 타임을 줄 수 있었다. 보스턴의 성추행 피해 아동에게 스포트라이트의 탐사 보도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면에서 로스트 타임은 상실의 시간이자 회복의 시간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탐사 저널리스트가 밝히는 스포트라이트들
이 책의 저자 이규연은 탐사 저널리스트. 중앙일보 탐사기획 에디터, JTBC 초대 보도국장을 거쳐 현재 탐사기획국장으로 탐사보도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기획 및 진행을 맡고 있다. 2005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탐사보도협회 특별상을, 두 번의 한국기자협회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중앙일보에 입사해 탐사보도 한길을 걸었다. 고려대학교에서 과학학과 KAIST 미래전략대학원에서 미래학을 공부한 것은 저널리스트로서 사회문제와 시대 흐름을 앞서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항상 한발 늦고 뒤늦게 분노했다. 지난 30년은 위법과 합법 사이, 두려움과 정의감 사이에 솟은 교도소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홀로 걷는 시간이자 탐사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이 책은 묻혀 있는 진실을 발굴하고 마지막 한 조각까지 짜 맞추며, 공익 탐정으로 탐사보도의 길을 개척해온 한 탐사 저널리스트의 분투기이며 성장기다. 세상은 무관심으로 파괴된다. 직접 마주한 현장은 생각보다 참혹했고 그곳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밝혀진 진실이 우리를 할퀴더라도 그 진실은 확인하지 않은 의혹보다는 값지다.
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잠든 척한 사람은 깨울 수 없다
탐사 취재를 하면서 진짜 잠든 사람과 잠자는 척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책임 소재를 묻는 차원이 아니다. 잠든 척하는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나 비리는 더 교묘하게 은폐되기 때문이다. 힘 있고 교활한 사람이나 집단일수록 잠자는 척을 잘할 가능성이 크다.
3개월 후, 임은정 검사는 또 '사고'를 쳤다. 신문 기고에서 성 비위에 연루된 일부 검사의 이름을 실명으로 적시했다. 포털 검색어에 '임은정' 이름이 하루 종일 올라와 있었다. 임 검사는 자신이 몸담은 검찰 조직과 언제까지 대결을 할까. 그녀는 인터뷰 중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검찰을 나올 때까지 계속되겠죠"
워터게이트
권력의 비참한 말로는 부정 그 자체에서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워터게이트가 그랬다. 도청 장치의 설치라는 부정으로 닉슨이 하야下野하지는 않았다. 닉슨이 도청 장치 설치에 직접 관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인 타격을 우려해 이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그 폭발력은 배가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몰락의 길로 들어선 초입에 최순실의 역할을 숨기려 했던 거짓말이 잇었다. 최순실의 역할을 '사적 영역의 주변 인물'로 축소하려 했다. 이는 국민의 분노를 축적시켰다. 박 전 대통령이 처음부터 최순실 수사를 검찰에 전적으로 맡겼더라면 탄핵 발의까지 갔을까?
"권력을 탐사할 때 부정 그 자체만이 아니라 부정의 은폐에도 주목해야 한다"
세월호 진실 조사
2018년 8월 3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전원 회의가 열렸다. 침몰 원인을 두고 공방이 벌어졌다. 내부 결함과 외력 가능성을 두고 전문가들의 설전이 펼쳐진 것이다. 3일 뒤, 선체조사위의 마지막 기자회견이 열렸다. "죄송하다", "합의된 결론을 내지 못했다" 등 침몰 원인을 두고 보고서의 결론이 둘로 쪼개진 것이다. 즉 선체 내부에 침몰 원인이 있다는 내인설內因說, 외력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외인설外因說이었다.
그런데, 자로의 <세월X> 다큐는 유튜브를 통해 방영되었다. 2016년 12월이었다. 내용은 상당 부분 박근혜 정부 때 발표된 사고 원인, 즉 과적, 고박 불량, 조타 실수, 복원력 부실 등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량의 4분의 1정도를 '외력 충돌설'에 할애하고 있었다. 이 다큐의 구성은 기존 검찰 발표에 합리적, 과학적 의문을 제시하는 내용이었고, 검찰 발표가 맞지 않다면 그것을 '외력설'로 설명할 수 있다는 논리 구조를 갖고 있었다.
자로는 세월호가 기울기 전에 충격음을 들었거나 혹은 동시에 들었다는 사람들은 쿵! 쾅! 꿍! 식으로 단음을 많이 들었다며 이는 외력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 이 지역엔 암초도 없었기에 배의 밑바닥과 가까운 쪽, 좌현 선수 쪽에 무언가 충격이 있었다는 강한 확신을 근거로 내세운다. 이 유튜브는 조회수 400만이 넘는 기록을 세웠다. 가히 그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일부 신문을 이를 음모론으로 매도했다.
때에 따라 대중의 상식에 반하는 내용도 보도해야 한다. 그것도 탐사보도의 운명이다. 공정성과 균형성을 잃지 않고 사실 확인을 꼼꼼히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누군가 세상의 진실을 자세히 밝히려고 할 때 이것을 방해하려는 자들이 들이대는 논리가 음모론이다. 그래서 세월호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어금니 아빠의 가면
'어금니 아빠'에서 흉악한 살인자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영학의 '인간 가면'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되돌려보면 그를 먼저 검증하고 피해자 김양을 살릴 기회는 많았다. 천사로 포장된 사이코패스! 우리가 방심한다면, 제2, 제3의 이영학은 반드시 나타난다. <탈무드>의 명언이 떠올랐다.
죄는 처음에는 거미집의 줄처럼 가늘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배를 잇는 밧줄처럼 강해진다.
이영학은 2005년 방송에서 자신의 희귀병을 물려받은 딸을 살리려는 부성애를 보여주며 유명해졌다. '어금니 아빠'라는 애칭도 얻었다. 그는 딸의 병원비가 수억 원이라며 시청자에게 온정을 구했다. 반지하방에 살던 그는 후원금 입금으로 고급차를 샀다. 후원금 13억 중 정작 딸 치료비는 1억 대였다. 10억이 넘는 나머지 돈은 어디에 썼을까? 아무리 보도라도, 인물이 사건의 중심이다. 사건을 추적하면서 인물의 과거를 추적해야 한다. 이를 서양 언론은 '백그라운드 체크'라고 한다. 이영학의 취재는 백그라운드 체크의 결과물이었다.
비리는 학력, 재산, 명예, 그 어떤 것과도 관련성이 없다
탐사보도를 하다 보면 선인과 악인을 모두 만나게 된다. 문제는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상당수는 선과 악, 두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물론 그 비율이나 선행과 악행의 정도에는 차이가 난다. 적어도 사회적으로 중대한 해악을 끼치지만 않는다면 악인이라고 규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악이 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를 가려내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황우석 박사는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망을 크고 밝아서 송아지를 연상시켰다. 송아지와 함께 있는 그는 분명, 전형적인 농업과학자 분위기였다. 언변 역시 신뢰가 갔다. 그는 젊은 기자인 저자에게도 친절했다. 수의과학자 황우석에 대한 첫인상이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 정치권은 황우석 브랜드를 통해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노무현 정부는 생명공학을 정보통신에 버금가는 주력 산업으로 육성하고 싶어 했다. 그러다 보니 대중 스타인 황 박사를 영웅으로 띄우려 햇다. 청와대, 장관, 국회가 황 박사를 치켜세웠다. 야당의 유력 인사들도 황 박사의 실험장과 목장을 찾아가 인증 사진을 찍었다. 스스로 만든 영웅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로는 불온한 생각이 세상을 좀 더 안전하게 할 수 있다
X-이벤트는 공포로 다가올 때가 많다. 공포는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X-이벤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공포영화를 자주 보면 면역이 생기듯, X-이벤트를 상상함으로써 대재난에 대한 적응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X-이벤트는 확률적으로 계산돼 나오지 않거나 극히 낮은 발생 확률을 가진 극단적인 사건이다.
현실적인 상황과 비용 등을 감안할 때, 발생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에 대비해 100퍼센트의 예방책과 대응책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짜는 것만으로도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재난에 잘 적응할 수 있다. 때로는 불온한 생각이 세상을 좀 더 안전하게 할 수 있다. X- 이벤트를 촉진하는 요인은 "기후 변화, 글로벌화, 네트워크화" 등 3가지 요인이다.
어떤 진실도 확인하지 않은 의혹보다 값지다
우리 정치와 언론은 지난 국정 농단 사태에서 값진 교훈을 얻었다. 주요 인사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대선 후보 경선에서 격돌하며,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우리는 측근의 그림자에 눈을 감았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쓰러져 가는데도 단순히 괴질을 앓을 뿐이라며 한동안 발을 뺐다. 버젓이 '만들어지는' 간첩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태해서, 네거티브 공세가 두려워,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검증 대열에 서지 않았다. 공동체는 탐사하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