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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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는 게 집에서 멀어지는 건지 가까워지는 건지, 보라보라에 도착하면 여행이 시작되는 건지, '그'가 외간 남자인지 남편인지조차 몰랐던 , 아직은 모든 것의 경계가 희미했던 나의 첫 보라보라. 그 시작을 함께해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결혼식 없는 결혼을 했고 검은 고양이 쥬드와 함께 보라보라섬에 살고 있다.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 '프롤로그' 중에서

 

 

남태평양의 보라보라섬에서 살다

 

책의 저자 김태연은 언제나 여름인 남태평양의 외딴섬 보라보라에서 9년을 살았다. 맨몸으로 바다를 헤엄치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별자리를 바라보며 온갖 나무와 꽃 이름을 알게 되는 근사한 삶을 꿈꿨지만, 사실은 암막 커튼 쳐놓고 넷플릭스 보는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먼 북소리가 아닌 인생 종 치는 소리가 들려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 ‘보라보라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약 4년간 칼럼을 연재했다. 지금은 잠시 섬을 떠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으며, 다시 심심한 세계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다.

 

남태평양 폴리네시아는 백 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 제도 중 한 곳이 보라보라섬이다. 흔히 요즘 젊은이들에겐 '신혼여행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그런 휴양지이다. 그 유명한 화가 폴 고갱이 인생의 말년을 보낸 곳이 인근의 타히티섬이다.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니 폴리네시아의 풍광은 푸른하늘과 넓게 펼쳐진 비취빛 바다가 가히 쉬어감직해 보인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섬이라곤 우리나라 남쪽의 제주도와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아버지를 모시고 온천여행을 갔던 일본의 삿포로가 전부다. 요즘 신혼부부들은 괌, 하와이, 몰디브, 타히티 등지로 하니문 여행을 떠난다고 하지만 난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갔었다. 당시 처음 가 본 제주도는 멋진 이국적인 풍광 탓에 무척 인상이 깊었기에 이후에도 휴가철엔 가족여행으로 종종가곤 했다.

 

그런데, 저자가 살고 있는 보라보라섬은 잠간이면 몰라도 여기서 줄곧 살아간다는 게 다소 단조로와서 지겹겠다는 개인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기사 인생이 뭐 별건가? 하루하루 행복하면 그뿐이지. 그래서일까, 이 책 속엔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빛의 바다와 하늘에서 힐링받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시끄럽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와 동떨어진 섬에서 살아간다는 게 마치 떠다니는 배에서의 선상생활과 비슷할 것 같다. 기본적으로 양식과 기름 등을 충분히 비축해둬야겠기에 말이다. 화창한 날씨가 일년 365일 내내 이어질 수는 없는 법, 혹여 태풍이라도 들아닥치거나 폭풍우가 몰려온다면 외출은 아예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꼼짝 없이 실내에서만 지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필품이 동이 나더라도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뭍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그냥 버텨야만 할 것이다. 하기사 제주도에 살던 과거의 젊은이들도 늘 뭍을 그리워했다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돈 쓸 곳이 없어서 소비생활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그들이 소비생활을 안 하니까 파는 곳이 안 생기는 건지 궁금했다. 모아나의 가족들을 만나고 나니 후자가 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제한된 소비생활을 할 수 있는 이들이 더 풍요롭고 느긋하게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소비할수록 우리는 더 결핍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34쪽)

 

함께사는 고양이 쥬드는 네 살이다.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30대, 얼추 저자의 나이와 비슷한 셈이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들 고양이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을 성큼 앞질러 갈 것이다. 당연히 쥬드도 그럴 것이다. 아무튼 쥬드는 보라보라섬에서 저자의 한국말을 들어주는 유일한 친구다. 말이 통하겠냐마는. 어쩌면 쥬드가 말을 할 수 없기에 안심하고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잠결에 가족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빠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언니와 남동생은 소파에 아무렇게나 누워 과일을 먹고 있다. 눈을 뜨니 보라보라섬. 모든 것이 꿈이었다. 이럴 때 나는 깜짝 놀란다.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내 모습이 낯설다. 막상 한집에 살았을 때는 그렇게 당연하게 여겼으면서, 사소한 일로 미워하고 지겨워했으면서. 가족이란 정말 뭘까. 사랑하고 미워하는, 힘 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약이고 병인 사람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일,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 가능한 태도로 표현하는 일. 아마 자주 짜증이 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반복해서 실패하겠지만,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내 서로를 제대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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