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의 인문학 - 천천히 걸으며 떠나는 유럽 예술 기행
문갑식 지음, 이서현 사진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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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하는 버릇이 하나 있다. 여행하는 곳과 관련 있는 예술가와 작품을 찾아보는 것이다. 시, 소설, 그림, 조각, 음악 등 우리가 걸작이나 명작이라 부르는 작품을 한껏 감상하고 여행지로 떠나면, 단지 눈에 보이는 그 공간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까지 여행할 수 있다. 마치 카페 센트럴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프로이트, 폴가, 츠바이크, 로스가 한자리에 모여 열을 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 '시작하며' 중에서

 

 

인문학 여행을 떠나다

 

책의 저자 문갑식은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며,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세계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산책자로 사진작가인 아내와 함께 예술이 깃든 명소를 여행하고 거기에 담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울프손칼리지 방문교수와 일본 게이오대학교 초빙연구원을 지냈다. 1998년 조선일보에 입사, <월간조선> 편집장 등을 지냈다.

 

 

 

피렌체와 베키오 다리

 

아르노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피렌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그 의미가 '오래된vecchio 다리'인 이 다리는 1345년에 지어져 7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모습 그대로 도시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이 다리에는 몇 가지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 다리가 연인의 명소가 될 수 있었던 일, 바로 피렌체와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평생 연모했던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 장소가 이 다리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단테는 자신의 연인을 <신곡>이라는 불멸의 작품 속에 담아 영원한 사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 다리를 찾는 연인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자물쇠를 걸어 다리에 매달거나 아르노강에 던진다고 한다. 서울 남산타워에서 연인들이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버림으로써 헤어짐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행동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이별을 막는 영원한 안전장치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베키오 다리

 

 

오스트리아 빈, 그리고 구스타프 클림트

 

화려한 왕족과 귀족을 대신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주인공이 된 것은 수많은 천재와 예술가였다.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표현주의의 시조 오스카어 코코슈카, 그리고 끔찍한 대학살을 저지른 전범이자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 등이 세기말의 빈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세기말 불꽃처럼 등장한 이들의 주요 무대는 어디였을까? 바로 살롱과 카페다. 빈이라는 도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커피라는 단어와 무척 밀접하게 느껴진다. 빈의 카페를 누비고 다녔던 수필가 알프레트 폴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카페란 혼자이고 싶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 동시에 옆자리에 벗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처럼 예술가와 지식인에게 살롱과 카페는 자유롭게 작품을 구상하고,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설파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p.53-54,

빈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가는 누구일까? 이 도시를 빛낸 이는 화려한 색채감을 자랑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다. 1862년 빈 인근의 움가르텐에서 귀금속 세공사인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 7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유럽과 미국을 덮친 장기 '대불황'으로 가세가 기운 탓에 일자리를 찾던 중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본 친척의 도움으로 빈 응용미술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여기서 거의 모든 미술 분야 공부를 했다.

 

그런데, 그는 '빈의 카사노바'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여성 편력이 대단했다. 그의 작품엔 대부분 여성이 등장한다. 유대인 금융업자의 딸인 아들러, '빈의 꽃'으로 불린 알마 말러, 작품 '다나에'의 모델이 된 미치 짐머만, 정신적 사랑을 나눈 에밀리 플뢰게 등이 대표적이다. 클림트의 대표작은 벨베데레 궁전에 가면 감상할 수 있다.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 '키스'도 이곳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잇다.

 

  

 

 

잘츠부르크와 모차르트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기원전 2세기 경 시작된다. 기원전 179년 켈트족이 현재의 오버외스터라이히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곳엔 암염, 즉 소금 광산이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다. 켈트족이 처음 왕국을 세운 곳이 바로 잘츠부르크다. 독일어로 '잘츠'는 바로 '소금'이다. 고대의 소금은 '돈'으로 직결되는 인간의 필수 식재료였기에 켈트족이 세운 고대 왕국(노리쿰)은 넓은 영토를 지닌 강력한 왕국이었다. 14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심지가 되었고, 16세기엔 전성기를 맞았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이었다. 모차르트는 고작 3살 때부터 건반을 다루고 연주할 줄 아는 음악 천재엿다. 그랬기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기록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5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며, 뮌헨, 런던 등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고, 걸출한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매우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1787년 어느 날, 그의 집에 한 소년이 찾아왔다. 바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서른한 살의 모차르트는 갓 열일곱 살이 된 소년에게 반해 이렇게 말했다. "이 젊은이를 주목하십시오. 곧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릴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둘의 관계는 베토벤의 어머니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고작 한 달 만에 끝나고 만다. 베토벤이 다시 빈을 찾은 것은 모차르트가 죽은 지 1년 뒤인 1793년의 일이다.

 
하지만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관한 극적인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모차르트의 전기 작가 오토 얀의 일방적 주장 외에 둘의 만남을 증명할 증거나 증언이 없기도 하거니와, 당시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 작곡에 열중하느라 무명 소년을 만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거짓이라 할지라도 무척 매력적인 이야기여서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보카치오와 데카메론

 

그리스어로 '데카'는 열(10), '메론'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데카메론>은 열흘 동안의 이야기인데, 7명의 숙녀와 3명의 신사가 하루에 10개씩 총 100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로마제국이 붕괴되고 유럽은 천 년 가까이 암흑기인 중세 시대를 겪게 된다.당시 세상의 모든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기 때문에 '암흑기'라 불린다. 이후 르네상스 국면으로 인간이 점차로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데카메론>의 탄생 배경은 흑사병(페스트)이다. 쥐벼룩이 옮기는 전염병인 페스트는 14세기 유럽을 강타했다. 당시 유럽인구의 33%~25% 정도가 이 유행병으로 죽었던 것이다. 치료법이 없었기에 막연히 사람들은 신의 징벌로 여겼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처럼, 유럽에 밀어닥친 페스트는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이 종말의 순간은 보카치오는 <데카메론> 서두에 기술하고 있다.

 

마흔의 나이에 <데카메론>(1353년)을 완성한 보카치오는 집필 활동을 이어간다. 1359년에는 밀라노에서 아홉 살 연상인 페트라르카와 만나 친교를 맺게 되는데, 이들의 인연으로 인류는 큰 선물을 얻게 된다. 말년에 신앙에 몰두한 나머지 비종교적인 작품을 모두 불태우려고 했던 보카치오에게 페트라르카는 세속 학문과 기독교 신앙은 별개이기에 굳이 작품을 태울 필요가 없다고 만류한 것이다. 이들의 친교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데, 1374년 페트라르카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보카치오가 그 뒤를 따른다. 소중한 문화유산이 하마트면 불에 모두 타버릴 뻔했다. 정말 아찔한 장면이었다.

베네치아와 카사노바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한 베네치아'물의 도시'라는 별칭이 있다. 수많은 섬이 수백 개의 다리로 이어진 항구 도시다. 한때 조만간 수면 아래로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이 떠돌았지만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베네치아에는 이탈리아 최초의 카페 '플로리안'이 있다. 카사노바가 자주 찾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자유로운 삶을 추구햇던 그는 '바람둥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들이 많다. 모차르트가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하고 있을 무렵, 예순 중반이 된 노년의 카사노바가 그를 찾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카사노바는 모차르트에게 자신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며, 문란한 주인공 돈 조반니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카사노바보다는 돈 조반니가 훨씬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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