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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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빈 시간이 왜 그렇게 적은 걸까? 지금쯤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넘쳐야 한다. 과학 기술과 진보 정책은 한 세기가 넘도록, 우리를 고된 일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겠노라고 늘 약속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자유의 시간은 우리네 할아버지 시절보다 더욱 줄어들었다. 역설적이게도 부자가 될수록 더 고되게 일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시간이 적어진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 '들어가는 말' 중에서

 

 

 

 

게으름은 죄악이 아니다

 

책의 저자 로버트 디세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러시아 문학 연구자이자 TV 프로그램 진행자, 소설가, 에세이스트다. 그는 여행기 <사랑의 황혼(Twilight of Love): 투르게네프와 함께 하는 여행>으로 2005년 빅토리아 프리미어 문필가상을 수상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교와 뉴사우스웨일스에서 다년간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을 가르쳤다.

 

 

ABC 라디오 프로그램 <책과 글쓰기(Books and Writing)>에 10년 동안 출연하기도 했으며, 저서로는 자서전 <어느 어머니의 수치(A Mother’s Disgrace)>, 소설 <밤 편지(Night Letters)>와 <코르푸(Corfu)>, 명상록 <나날의 목적(What Days Are For)> 등이 있으며 유럽 여러 국가에서 출간되어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과거 때부터 인간 본연의 심성인 나태, 즉 게으름은 나쁜 것이거나 죄악시되었다. 이에 반해 여가란, 결코 물질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 순전히 그 즐거움을 위해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단장하고,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을 두루 아우를 때 쓰는 단어다. 그런데, 무턱대고 쉰다기보다는 여가를 누릴 때에도 기교가 중요하다. 즉 현명하게 선택한 여가는 아무리 짧은 삶일지라도 깊이를 준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재인들에겐 휴식을 위한 시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즈음 유행어가 되어버린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처럼, 이젠 과거와 달리 대부분의 기업들은 워라밸 맞춤형 복지를 내세우며, 근로자들의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 시간을 제대로 즐길 방법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책은 멋지게 보내는 게으름의 기술을 소개한다. 

 

 

 

 

모든 사람은 게으름뱅이가 되기를 원한다

 

일이 아무리 즐겁고 유용하거나 필요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노예상태다. 그렇기에 여가의 첫째이자 으뜸가는 목표는 우리를 우리 시간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일할 때는 결코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가가 무엇일까? 먼저, 여가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빈둥거림에 관해 과연 덕목인가 아니면 악덕인가?

 

역사적으로 특혜받은 계급은 자신들의 특권을 마음껏 향유할 요량으로 아랫사람이나 하인들의 빈둥거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저 나태란 나쁜것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동로마제국 시절엔 '놈팡이 밀고법'이 있어서 비잔틴의 특정 계급 사람은 당국을 비난하는 자를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 천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잉글랜드의 헨리 8세도 백성들을 부지런함을 권장할 목적으로 게으름은 신을 "몹시 노하게" 만들고, 나아가 왕국을 쇠퇴와 가난으로 몰아넣는다고 선언했다.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한다.

 

1750년대 말,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때 새뮤얼 존슨'아이들러idler'라는 칼럼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모든 사람은 "게으름뱅이이거나 게으름뱅이가 되기를 원한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수많은 사상가와 특정 계급 작가에게도 이는 매력적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균형 잡힌 삶을 위해 세계적인 명사들의 소위 '게으름 예찬'은 줄을 이었다.

 

"가장 큰 기쁨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 또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다" - 안톤 체호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신성한 일이다" - G.K.체스터턴

 

"개 한 마리와 함께 언덕 비탈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에덴으로의 회귀'다" - 밀란 쿤데라    

 

 

무위도식에 바치는 찬사

 

낮잠에서 깨어나면 우리들은 차를 마신다. 고가엔 무엇을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은 대체로 차를 마신다. 차는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위한 음료다. 반면에 호지킨슨은 커피를 노동자들이 마시는 음료하고 말햇다. 차는 느긋하게 마시는 것이다. 일본에선 불교 명상을 하는 동안 졸믕을 쫓기 위해 차를 자주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차는 품위 있는 오락인 반면 커피는 노동자들이 번쩍 정신을 차리고 행동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커피는 총도 아닌 것이 종종 '샷shot'으로 나온다. 오늘날 시내 거리마다 미지근한 커피 한 잔을 무슨 꽃다발이나 병리학 샘플 병처럼 받들고서 사무실이나 건설 현장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이 가득하다. 꼭 커피를 마셔야 한다면 어딘가에 앉아서 마시기를 권한다. 한량이라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앉아 있는 것을 갈망해야 한다.

 

 

 

 

시간의 주인이 되는 비결

우리들이 여가를 즐긴다는 의미는 바로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종류의 여가를 즐기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취미 목록을 들려준다. 물론 쇼핑은 취미가 아니다. 쇼핑이 인간의 오랜 활동을 재창조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놀이의 한 형태라는 의미에서는 취미라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아마도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몇몇 배우들한테나 해당될 것이다. 쇼핑은 왜 취미가 아닐까? 취미란 무엇일까?

 

취미란 물질적 이득을 바라지 않고 오직 이것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 때문에 주기적으로 탐닉하는, 경쟁하지 않는 오락이다. 텔레비전 시청, 비둘기 훈련시키기, 백화점에서 어슬렁거리기 등이 그렇다. 취미라는 단어엔 점진적인 기술 습득이나 어떤 감식안을 갖춰나가는 과정의 의미가 포함된 것 같다. 하지만 앞서 열거한 백화점 쇼핑엔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우표 수집은 단순한 유표 사재기가 아니다.

 

노는 것은 스스로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를 알고 있었고, 키케로와 세네카는 이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중국과 유럽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이런 통찰을 이야기했다. 우리들은 자신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쓸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노는 것에 그 이상의 목표는 없다.

 

몇 백 년 동안 지배계급이 노동은 신성하다고 주장해왔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부자를 포함해 나머지 모든 사람이 뼈가 부서져라 일할 때, 그들은 자유롭게, 종종 목숨을 걸어가며 그들의 게임을 하며 놀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일해야 할 의무가 도대체 왜 "성스럽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허튼 소리다. 이제 우리들은 이 말에 콧방귀를 뀌어야 할 것이다.

 

 

시간의 존재 이유는 행복에 있다

 

 

시간은 사실 그 안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웅덩이에서 한가롭게 지낸 뒤 저 웅덩이에서 느긋하게. 시간은 그 안에서 우리들의 인간성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요, 그 안에서 나라는 존재의 무한성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끝을 맺는다면, 한마디로 그 안에서 에우다이모니아eudaemonia, 즉 행복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에 다른 좋은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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