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코리아 - 대한민국 청춘이여, 결코 아프지 마라!
이영현 지음 / 성안당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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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경제적 자유를 지향하며 40년 세월 동안 무역인으로서 그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덕분에 '부富'라는 기준에서 평가하면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부한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심지어 죽을 고비까지 넘겨가며 벌어들인 재화는 나의 곳간에 차곡차곡 쌓였고, 은퇴 후 100세까지 살아갈 노후자금도 넉넉하게 마련해놓을 수 있었다. - '머리말' 중에서

 

 

92세까지 세계를 돌며 '자비 강의'를  실천하다

 

이 책의 저자 이영현세계한인무역협회 명예회장으로, 40년간 전 세계 방방곡곡 오직 한국 제품만을 판매해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1세대 무역인'이자 한인 무역인의 구심점인 세계한인무역협회의 출범을 주도했다. 후배 양성을 위해 '차세대 무역스쿨'을 창설, 16년째 사비를 털어 지구 16바퀴를 돌며 강의를 열고 있다. 나아가 앞으로 꼭 16년만 더 후배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하겠다고 굳게 약속한다.

 

스물네 살의 나이에 단돈 200달러만 들고 훌쩍 캐나다로 떠난 젊은 청춘 이영현, 오직 아이스하키의 꿈 하나 안고 힘든 유학길에 올랐지만 간절했던 꿈은 물거품이 되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행상이 그를 무역인의 길로 인도했다. 무역인으로 살아온 40년 세월, 수많은 냉대와 좌절 속에서도 그가 취급했던 모든 제품은 한국산, 'Made in Korea'였다.

 

비록 그가 살았던 시대와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시대는 제반 여건들이 많이 다를지라도 세대를 막론하고 성공의 핵심을 관통하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지난 40년 동안 세계를 무대로 대한민국 제품을 팔았던 '1세대 무역인'의 경험을 통해 우리들은 성공의 핵심과 노하우가 무엇인지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특히 현재 무역인의 길을 걷고 있는 업계 종사자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가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뛰어든 것은 1960년대다. 이 때는 한국 경제의 수준이 매우 낮았던 시기로, 전 세계 217개 나라 중 뒤에서 그 순위를 찾는 게 빠를 정도로 GDP 80달러를 갓 넘긴 시점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긴 북한의 남침으로 촉발된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10여 년 정도 지났을 정도로 대한민국은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기에도 벅찼다. 1일 3식은 일부 특권층과 부유층만 누릴 수 잇는 호사였다. 길거리엔 전쟁고아와 거지가 넘치고, '꿀꿀이죽'도 먹지 못하는 그런 경제 환경이었다. 

 

어느 누구든지 이런 때를 만나면 살아남는 것, 즉 생존 본능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애국심 따위는 후순위가 된다. 모든 물자가 부족한 그때 대한민국의 현실은 참담하고 암울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모든 물자가 풍족하고 넘친다. 그럼에도 이를 갖지 못하는, 아니 가지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젊은 청춘들은 이 땅에 어떻게 대한민국이 생존할 수 있었는지를 불문에 부치고 그저 자기 자신의 욕망 기준에 들지 않는다고 '헬조선'을 외친다.

 

1956년, 저자는 우연한 기회에 아이스하키를 배울 수 있었다. 경복고등학교 재학시절이었다. 당시 미국에 유학 중이던 한 지인이 그에게 스케이트를 선물해 준 덕분이었다. 그때 한국에서의 아이스하키 장비는 대부분 캐나다산이었다. 논두렁에서 뛰노는 자식이 안쓰러워 부모님이 마련해 준 스틱도 '메이드 인 캐나다'였다. 아이스하키가 전부였기에 저자에게 캐나다는 이젠 신앙과도 같았다. 


그래서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공군에 자원 입대했다. 당시엔 군필을 해야만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여권이 발급되었기 때문이다. 수원에서 3년간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캐나다 유학 수속을 밟았다. 1966년, 부모님을 졸라 200달러를 들고 꿈의 나라 캐나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지금의 청춘들은 '공무원' 시험 준비로 노량진 학원에서 시간을 탕진하고 있는 게 너무나도 안타깝게 여겨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이 원한 바대로 캐나다에 발을 내딛었지만, 당장 시급한 것은 민생이었다. 갖고 간 200달러는 금방 동이 났기 때문이다. 첫 직장인 레스토랑에 취업했지만 조화를 생화로 착각해 식당 바닥을 물바다로 만든 탓에 해고 통보를 받고, 두 번째로 건물 청소회사에 취직해 물청소 후 암모니아를 칠해 윤기내는 일을 하다가 일머리가 부족해 출입구 반대편에서 시작해 입구쪽에서 마감해야 함에도 반대 방향으로 작업함으로써 암모니아 냄새에 취해 의식을 잃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후 인력시장을 통해 농장에서 지렁이 잡는 일을 약 두 달 동안 했는데, 급여가 워낙 박했다. 그래서 다른 직장을 찾다가 캐나다 항공사 조립라인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영어가 서툴러서 동료들에게 무시당하자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만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량은 동료보다 월등히 많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관리자가 그의 작업량을 기준삼아 일을 할당함으로써 동료들의 태클이 들어왔던 것이다. 망치 공격을 당한 그는 통쾌한 발차기로 오히려 상대를 응급실로 보내버렸다. 결국 여기서도 해고되었다.

 

우리 모두가 밟고 다니는 땅이 평평하지 않듯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여건 또한 울퉁불퉁하다. 즉 출발선이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각자 가진 능력은 모두 다르다. 그래서 흙수저, 은수저, 금수저 같은 계급이 생긴 거다. 물론 능력있는 부모의 지원이 성공의 충분 조건이긴 하다. 그러나, 절대적인 필수 조건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공의 필수적 요소는 자기 자신의 '절박함'인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캐나다로 유학가서 부모 도움 없이 자신의 목표를 기어코 해내겠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었기에 엄청난 노력을 했고 그래서 성공한 무역상이 된 것이다.

 

'노력은 결코 결과를 배신하지 않는다'

 

1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끝에 그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언어의 소통이었다. 현재 방탄소년단BTS가 한국의 아이돌 가수 중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평가받는데, 여기엔 리더 역할을 하는 RM의 유창한 영어 구사력이 강점으로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그는 오히려 '어학원'이 아닌 '대학 입학'을 선택했다.

 

이젠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30여 권의 영어 참고서를 캐나다로 공수받아 책과 씨름을 했다.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온통에 영어에 미쳐서 살았다. 마침내 그는 토플 점수 580점(만점 700점)을 획득, 대학 입학을 허가받았다. 그 즉시 그는 자신에게 이 길을 밝혀준 멘토 격인 템플 교수에게 달려갔다. 6개월의 고생이 빛을 보게된 것이었기에, 템플 교수도 자신의 일인양 기뻐하며 칭찬해 주었다.

 

대학교 입학 후 그는 또 다시 일을 시작했다. 택시 운전은 학업과 병행할 수 있는 '잡'이었다. 낮엔 공부하고 밤엔 일을 하는 그야말로 '주독야경晝讀夜耕'의 연속이었다. 그의 대학 생활 중 가장 인상에 남는 던샤워 교수는 친한국 정서를 지녔기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작 학점은 'F학점'을 주면서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는 저자의 이후 사업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지구를 열여섯 바퀴 돌면서 강의하다

 

16년 째 사비私費를 털어 소위 '자비 강의'를 위해 지구를 열여섯 바퀴 돌면서 250여 회 이상의 강의를 해 온 저자는 자신이 걸어온 성공담과 실패담 등을 두루 우리들에게 전한다. 지난 40년 간 세계를 활동 무대 삼아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만을 팔았던 '1세대 무역인'의 인생 스토리는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 청춘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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