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사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빈곤의 인류학
조문영 엮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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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민 세입자 출신으로, 철거민들이 만든 논골신협을 운영 중인 유영우 이사장이 학생들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무임승차" 문제를 언급하며 출자금을 내지 않고 협동조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는지 여쭤봤는데, 정작 본인은 "무임승차"가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이다. "이타심이 작동하지 않으면 협동조합은 운영이 안 된다"는 그의 대답은 "타인의 '무임승차'를 노여워하며 빗장을 걸어 잠그는" 자신을,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를 터주었다. - '서문' 중에서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책의 저자 조문영은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인류학과에서 서울시 신림동 난곡 지역의 가난과 복지의 관계를 다룬 연구로 석사학위를, 스탠포드대학교 인류학과에서 중국 동북 사회주의 노동계급의 빈곤화 과정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국과 한국의 빈곤, 노동, 청년, 사회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THE SPECTER OF "THE PEOPLE">, <정치의 임계, 공공성의 모험>(공저), <헬조선 인 앤 아웃>(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분배정치의 시대>가 있다.

 

빈곤이라는 주제가 점점 한국 사회 공론장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는 게 아닌지 함께 고민하고 싶었던 저자는 총 10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세 가지 문제를 집중 조명한다. 한국 사회 빈곤 문제의 쟁점은 무엇인지, 빈곤 활동이 현재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청년들에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빈곤은 어떤 모습인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형식을 띄고 있어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해당 문제를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책은 용산참사로 포문을 연다. 현재 용산4구역은 주상복합단지로 변신 중이다. 당초에 세웠던 용산국제업무지구 - 역세권 개발사업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초유의 대규모 PF사업이라고 떠들썩했던 이 프로젝트는 투기거품만 만들어내면서 경제적 약자를 죽음으로 내몬 이후 결국 무산되고 만 결과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인근의 땅을 매입, 시세차익을 본 용산구 국회의원 진영은 4선 의원을 거쳐 문재인 정부의 행정안전부 장관이며, 과잉진압의 책임자인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현재 경주시의 국회의원이다.

 

 

 

 

먼저 떠오르는 책 한 권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장 지글러는 고통받는 이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려야 겠다는 심정에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저술, 출간했다. 몇 년 지난 도서이다. 고통의 외면이라는 측면에서 이 책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에 장 지글러의 도서가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가? 

 

이는 개개인의 도덕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미래 사회의 모습을 먼저 소개한 대목엔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으로 변모해있다. 그렇지만 결코 로봇이 인간화될 수 없음을 학자들은 지적한다. 왜 그럴까? 이 또한 로봇에게는 인간 본연의 감정인 도덕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하지만 이토록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도덕성이 결여된 인간의 행위는 로봇 같은 기계에 못지 않는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역사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난 나치의 행위, 어리디 어린 꽃봉오리를 무참히 짓밟은 일본 군국주의가 자행한 위안부 사건, 또 열 살 미만의 지구촌 어린이가 5초마다 1명씩 아사餓死하는 참상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식량농업 독점세력은 수확한 옥수수와 밀을 바이오에탄올과 바이오디젤의 생산을 위해 소각하는 행위를 한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경험과 감정에서 비롯된다"

- 데이비드 흄, 철학자

 

자, 다시 용산참사로 돌아가보자. 왜 용산참사가 발생했을까? 이는 바로 돈과 직결되어 있다. 돈을 벌겠다는 개발 프로젝트와 이에 동참하는 부동산 투기세력은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경제적 약자들을 주거공간 내지는 삶의 터전에서 밖으로 내몰아낸다. 갈 곳없는 이들은 결국 공권력에 대항하며 죽음도 불사하는 항거에 나선다. 물론 이에 동참하지 않는 철거민도 분명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

 

시사상식사전은 용산참사를 '2009년 1월 20일 서울시 용산 재개발 보상대책에 반발하던 철거민과 경찰이 대치하던 중 화재로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용산 4구역 재개발의 보상대책에 반발해 온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 등 30여 명이 적정 보상비를 요구하며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경찰과 대치하던 중 화재가 발생해 6명(시민 5명,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한 대참사다.

 

그런데, 이 사건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당시에 진행되었던 검찰과 경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결이 농성자들의 잘못에만 초점을 맞춘 결과였기에 억울한 당사자와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빈곤한 약자들의 사회에 대한 부당한 항거와 농성에 대해서만 벌을 내리고 무리한 진압작전을 펼쳤던 공권력은 무혐의처분을 내림으로써 지나치게 편파적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그래서, 최근 과거사위원회"검찰은 유가족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경제적 약자들의 고통과 목소리를 외면하고 개발지상주의로 국가의 사회정책을 펼쳐나간다면 앞으로도 얼마나 수많은 희생을 보아야만 이를 멈출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지나치게 생떼를 부리면서 개발행위를 막는 것도 분명한 위법이자 월권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럴지라도 이런 일은 해결은 우선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화두에서 출발돼야 한다고 본다. 즉, 함께 살아가는 방안을 모색하는 게 필수적인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이라는 그림 속엔 이미 그곳에 터전을 잡고 삶을 살아가던 힘없고 가난한 경제적 약자들의 고통을 담지 않는다. 이들이 이곳에서 쫓겨난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해법은 부족한 것이다. 이 땅의 실질적 소유자는 이어지는 매수희망자들의 투자로 인해 땅 값이 올라 배를 불리지만, 정작 여기에 세 들어 살던 가난한 이들은 아무런 혜택이나 대책도 없이 떠나야만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일방적 요구에 몸도 마음도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빈곤은 일부 소수가 스스로 만든 문제(?)

 

빈곤은 앞서 살펴본 굶주림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경계선 밖에 고립되어 있다. 우리 사회 또한 빈곤은 소수의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매스컴에서는 빈곤은 '극빈'과 '불쌍한 사람'으로, 동시에 본인 스스로 '자활'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의존적 인간'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빈곤사회연대는 이러한 빈곤의 재현에 맞서 빈곤에 처한 사람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조직하거나 사회구조나 제도상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갈수록 고립의 담과 울타리는 점점 높아지고 테두리가 넓어진다. '나도 한 번 잘 살아보겠다'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빈곤을 탈피하고자 미국으로 월경越境하는 멕시코인들이 증가하자 희대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이를 막고자 미국과 멕시코 간의 국경선에 높은 담을 둘러세우려 한다. 말하자면 '빈곤은 너희 사정이고 우리만 잘 먹고살면 된다'는 식의 비도덕적인 깡패 수준의 행위나 다름 없다.   

 

학교는 우리들에게 "가난한 건 본인의 노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어릴 적부터 우린 경쟁에 매우 익숙해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사회 모습이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는 '가난'은 누구의 탓이 아닌 본인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지만 알고보면 사회구조적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저항과 항거라는 반사적 행동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맞아, 이건 권리야'라고 말이다.

 

 

 

 

빈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서울역 지하통로의 홈리스들, 쪽방촌 주민들, 철거민들,  리어카 노점상 등이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빈곤의 모습은 근본적인 이유가 문제인지, 나아가 왜 이는 해결되지 않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함도 동시에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공생共生과 연대 방식'으로 그 대안을 풀어가는 활동가들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자립'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문제점들을 마주함으로써 진정한 '자립'의 의미를 다시금 성찰하게 된다.

 

최근에 발생한 '일본의 경제보복'도 트럼프의 정치적 계산과 맥을 같이 한다. 한국 기업이 죽어야 한국 경제가 죽을 판이 되어야 일본 경제가 이니셔티브를 잡고 동북아 경제를 주무를 수 있다고 아베는 판단한 것이다. 아마도 여기엔 아베와 트럼프 간의 사전 밀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미국도 자국의 반도체 사업 등에서 큰 반사 이익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빈곤은 경제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에도 이는 사회와 연결되는 사회학 분야이자. 사회구성원들을 컨트롤하는 정치학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빈곤은 여러 얼굴을 가진 모습이다. 따라서 책에서 소개되는 대학생 38인의 다양한 인터뷰 내용들은 모든 독자들에게 전적으로 동의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하나 분명한 사실은 빈곤이란 숨기려해도 결코 감춰지지 않는 치부이며, 이를 무시하거나 회피할 것이 아니라 공감을 통해 상호 이해하면서 경제적 약자를 돕겠다는 '측은지심'이라는 도덕성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라

 

장 지글러는 자신의 책에서 "매일 27만 명이 새로 태어나지만 10만 명이 매일 기아로 죽는 것이 지금 인간이 사는 지구의 현실이다"라고 강하게 지적한다. 이 책은 우리들에게 빈곤을 남의 일로만 치부하지 말고 열린 귀를 갖고서 세상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라고 주문한다. 이에 대해 우리들은 답해야 할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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