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서 이루어진 불교철학 강의를 기반으로, 지난 기간 교수-학생 간 불법佛法 토론을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현지 대학생들의 날카로운 질문과 홍창성 전담 교수의 21세기형 현답으로 그동안 우리도 잘 알지 못한 불교철학의 논리적이고 정교한 측면을 잘 드러낸 강의 모음집이다. 즉 무아 無我와 연기緣起, 그리고 공空과 같이 불교의 철학적 주제를 취급하는 24회 강의에 대한 에세이로 되어 있다. 각각의 에세이는 학생들과 실제로 또는 가상으로 주고받은 토론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데, 불교교리에 대한 저자의 견해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는가?
책의 특징 중 하나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미국인답게 학생들이 뭐든 대충 받아들이지 않고 불교 철학을 논리적으로 따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알렉스 존슨이라는 학생은 이렇게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붓다라면 오래전 인도에 살았던 고타마 싯다르타를 지칭할 텐데, 누구나 깨달으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누구나 고타마 싯다르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제가 깨닫는다고 해서 고타마 싯다르타와 동일인이 될 수 있습니까? 이치에 어긋나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명쾌한 답변을 한다. '붓다'라는 말은 보통명사로, 본디 깨달은 자라는 의미를 지녔으므로 어느 누구라도 깨달음을 얻는다면 붓다가 된다는 게 옳다고 학생에게 설명한다. 흔히 우리들이 부처라고 이해하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경우엔 영어식 표현에 정관사를 붙여 'The Buddha'라고 표현하며, 깨달음을 얻은 우리 개개인은 'a Buddha'가 된다.
깨달음과 열반
한국의 불자들 대부분은 깨달음이 인격 수양과 참선 수행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도덕 수양과 명상 수행으로 도달하게 되는 고뇌의 불길이 꺼진 경지는 사실상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涅槃'이다. 그렇다. 우리들 대부분은 두 개념을 혼동하여 뒤섞여 사용한다. 즉 붓다가 언제나 동시에 열반에 든 상태이다 보니 이를 동의어로 착각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 오류다.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금속 막대기에 열을 가하면 연성軟性과 전도성傳導性이 항상 동시에 증가하지만 그렇다고 이 두 개념이 동일한 게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늘 가는데 실도 같이 간다고 해서 바늘과 실이 같은 게 아닌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두 개념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을 여전히 어려워 하므로 저자는 열반을 행복과 연관지어 재차 설명한다.
치즈버거 한 개를 먹고 싶은 사람이 한 개를 맛있게 먹으면 행복하다. 그런데, 더블 치즈버거를 먹으면 더 행복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무한정 증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가능한 재화와 서비스의 양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의 욕구는 충족될수록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원하기 마련이다. 행복해지겠다고 더 많은 욕구를 충족하는 게 과연 현명할까? 누군가는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듦으로써 욕구의 양을 줄여 거의 0에 가까이 간다. 이런 설명에 한 학생은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불교에서 깨달으려는 욕구는 물 마시고, 밥 먹는 것과 같은 단순한 욕구가 아니지 않습니까? 생사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다시는 윤회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는, 정말로 굉장한 업적을 성취하려는 엄청난 욕구입니다. 깨달음을 원한다면 이런 굉장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텐데,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저자의 단계별 정리
1. 수행자가 고해에서 벗어나소자 깨달으려는 강한 욕구와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
2. 깨닫기 위해 경전 공부와 참선에 집념을 갖고 용맹정진한다.
3. 오랜 정진으로 심신이 자연스레 공부와 수행의 습관이 밴다.
4. 깨닫겠다는 의식적 욕구는 점점 줄어들어 아무런 집착 없이 공부와 수행을 계속한다.
5. 심신에 밴 공부와 수행은 자연스레 수행자를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다.
윤회輪廻
불교 철학의 가르침 중 중요한 대목은 바로 '윤회輪廻'이다. 이는 고대 인도인의 정신문화사상이다. 즉 중생이 죽은 뒤 그 업에 따라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사상이다. 육도의 세상이란 지옥, 아귀, 수라, 축생, 인간, 천상계를 일컫는데 쉽게 말해서 생전에 얼마나 착하게 사는냐에 따라서 사후 세상이 육도 중 한 곳으로 결정되어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 계속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섯 세상 모두 절대적 영원이란 없다.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면 지옥에서 인간계로, 천상계에서 다시 아귀계로 몸을 바꾸어 태어난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관이다. 우리집엔 이젠 나이든 애완견이 있다. 초등학생 딸을 가르쳤던 가정교사 여선생이 딸과의 인연을 이어가고자 젖을 갓 떼어낸 새끼 한마리를 중 3이 된 딸에게 분양했기에 우리 부부는 고심 끝에 깨달음을 얻어 나중엔 축생에서 인간으로 태어나라는 의미로 '보리'라는 이름을 주었었다.
기독교적 우주관에 길들여져 있는 미국 대학생들이 '육도윤회'를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한 학생은 윤회를 주제로 다루는 영화도 몇 편 감상했다면서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하며, 영혼 대신 윤회하는 것의 실체는 뭔가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한마디로 윤회의 시작과 끝이 어디냐는 물음인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어 윤회로부터 벗어난 아라한阿羅漢이 존재하는 장소에 대한 물음에 대해 그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답변했던 것처럼 그런 식으로 대응한다.
이어서 책은 열반에 대한 정의, 참선은 깨달움과 열반에 어떻게 도움되는지, 불성과 깨끗한 영혼의 차이, 불교가 종교인 이유, 불자들은 어떻게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지, 붓다의 무상무상의 가르침, 공공과 연기연기 등을 차례로 설명한다. 비록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이를 동양철학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 본다면 크게 거부감 없이 배울 수 있는 게 불교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교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이들을 위해 작은 소책자도 책과 함께 배송되었다. 난 여전히 공부가 부족하다. 그래서 이 책은 내 곁의 서재로 자리를 잡았다.